1934년 2월 10일 토요일, 밤이 깊은 뒤에 뉴욕 록펠러센터로 트럭 한 대가 들어왔고, 인부들이 비계를 세우고 RCA 빌딩 로비의 벽을 올랐다. 손에는 도끼가 들려 있었다.
벽에는 가로 11미터 45센티미터, 세로 4미터 85센티미터짜리 벽화가 있었고, 그들은 그것을 부수어 벽에서 떼어냈다.
그 벽화는 이미 아무도 볼 수 없었고, 아홉 달 전에 천으로 덮여 가려진 상태였다. 계약금 2만 1천 달러는 전액 지급된 뒤였고, 화가는 진작 해고됐으며, 작업은 미완성으로 멈춰 있었다. 돈은 돌려받지 못했고, 그림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굳이 부수었다. 왜 그랬을까.
예술이 정책을 바꾼 가장 극적인 사례, 더스트볼을 아시나요
지난 글에서 나는 1930년대 미국의 더스트볼을 다루면서 도로시아 랭의 사진과 존 스타인벡의 소설과 우디 거스리의 노래가 정치의 비용 계산을 바꾸어 놓았다고 썼다. 그 뒤로 비슷한 사례를 더 찾아보았는데, 자료를 파고들수록 눈에 들어온 것은 달랐다.
예술이 법을 바꾸었다는 인과를 문서로 증명할 수 있는 경우는 생각보다 드물었지만, 권력이 예술에 되받아친 기록은 지나칠 만큼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형량이 있고, 압수 목록이 있고, 서한이 있고, 배상액이 있었다.
그래서 질문을 뒤집어보기로 했다. 예술이 무엇을 바꾸었는가가 아니라, 권력이 예술에 무엇을 했는가. 무해한 것에는 아무도 도끼를 들지 않는다.
도끼를 든 밤
디에고 리베라가 록펠러센터 벽화를 의뢰받은 것은 1932년이고, 정식 제목은 길다. 『새롭고 더 나은 미래의 선택을 희망과 높은 비전으로 바라보는 기로에 선 인간』.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갈림길에 선 인간을 그린다는 원안이었고, 록펠러 가문은 그 원안을 승인했다.
문제는 1933년 4월 24일 《뉴욕 월드-텔레그램》이 벽화를 비판하는 기사를 실으면서 시작됐다. 리베라는 그 직후 원안 스케치에 없던 레닌의 두상을 그려 넣었고, 5월 초 물감이 흘러내리면서 발각됐다. 넬슨 록펠러가 보낸 서한은 정중했다.
"어제 록펠러센터 1호 빌딩에서 당신의 감동적인 벽화 진척을 보다가, 가장 최근에 그려진 부분에 레닌의 초상이 들어간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 부분은 아름답게 그려졌습니다만, 이 벽화에 그의 초상이 등장하는 것은 아주 많은 사람들의 심기를 대단히 심각하게 건드릴 수 있다고 봅니다. (…) 대단히 내키지 않지만, 지금 레닌의 얼굴이 있는 자리에 이름 없는 사람의 얼굴로 대체해 주실 것을 요청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리베라는 5월 6일에 답했고, 링컨을 대신 추가하는 절충안을 제시하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구상을 훼손하느니, 나는 차라리 그 구상 전체가 물리적으로 파괴되는 편을 택하겠다. 그래야 적어도 그 온전함은 지켜지니까."
5월 10일, 작업 중단 명령이 떨어졌다. 계약금은 전액 지급됐고, 리베라는 해고됐으며, 벽화는 천으로 가려졌다. 존 슬론을 비롯한 화가들이 보이콧을 호소했고, 리베라는 항의의 뜻으로 공산주의 계열 뉴 워커스 스쿨에 프레스코 21점을 기증했다. 그리고 아홉 달 뒤 그 토요일 밤에 도끼가 왔다.
리베라는 이듬해 멕시코시티 벨라스아르테스 궁전에 같은 벽화를 다시 그렸고, 제목은 『우주의 지배자, 인간』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록펠러 3세의 얼굴을 성병 세균이 떠다니는 유흥 장면 옆에 그려 넣었다. 부서진 벽화가 다른 나라 국립극장에 국가 예산으로 부활했다.
같은 화가, 같은 해, 다른 결말
같은 시기에 리베라는 디트로이트에서도 벽화를 그리고 있었다. 1932년부터 1933년까지 작업한 『디트로이트 산업』 연작이며, 디트로이트미술관 관장 발렌티너가 위촉했고, 에드셀 포드가 2만 달러를 냈다.
이 벽화도 공격받았고, 1933년 가톨릭과 성공회 성직자들이 신성모독이라고 했으며, 《디트로이트 뉴스》는 "저속하고 비(非)미국적"이라고 썼다. 회칠해 덮어버리거나 아예 철거하라는 요구가 나왔다.
그런데 살아남았다. 에드셀 포드와 발렌티너가 버텼기 때문이다. 같은 화가가, 같은 해에, 같은 정치적 태도로 그린 두 벽화 가운데 하나는 도끼로 부서지고 하나는 살아남았다. 그리고 살아남은 쪽은 2014년 4월 22일 미국 국가사적지로 지정됐고, 논쟁적인 정치 벽화가 국가 유산이 됐다.
무엇이 갈랐을까. 작품의 힘은 아니었다. 두 벽화는 같은 사람이 같은 신념으로 그렸고, 갈린 것은 그것을 지키기로 한 사람이 있었느냐였다. 그렇다면 지키기로 한 사람이 없었을 때, 권력은 무엇을 어떻게 지웠는가.
작품을 친다
가장 단순한 방식은 물건을 없애버리는 것인데, 기록을 뒤져보면 정말 없앤 경우는 의외로 드물다. 가지고 있으면서 보여주지 않는 쪽이 훨씬 흔했다.
프란시스코 고야는 1810년부터 1820년까지 『전쟁의 참화』 82점을 제작했다. 나폴레옹 군대와 싸운 반도전쟁의 학살과 기근과 시신 훼손을 영웅 서사 없이 새긴 판화 연작이며, 캡션이 곧 선언문이다. "나는 그것을 보았다." "차마 볼 수 없다." "위대한 무훈! 시체를 가지고!"
이 연작은 고야가 살아 있는 동안 단 한 점도 공개되지 않았고, 페르난도 7세의 절대주의 복고 체제에서 출판 자체가 불가능했다. 초판이 나온 것은 그가 죽고 35년이 지난 1863년, 그것도 82점 가운데 80점만이었다.
『1808년 5월 3일, 마드리드』도 마찬가지이며, 고야는 1814년 2월에 직접 청원해서 임시정부의 승인을 받았고, "우리의 영광스러운 봉기의 가장 주목할 만하고 영웅적인 행동들을 자신의 붓으로 영구히 남기고자 한다"는 것이 그가 쓴 표현이다. 그러나 페르난도 7세는 민중 봉기라는 소재 자체를 못마땅해했고, 가로 3미터 47센티미터짜리 이 그림은 그대로 창고로 가 30년에서 40년을 거기서 보냈으며, 프라도 미술관의 공식 카탈로그에 오른 해는 1872년이다.
국가가 소장하되 보여주지 않는 방식. 이것이 하나의 전형이 됐고, 한국에도 정확히 같은 사례가 있다. 신학철의 「모내기」는 1987년에 그린 그림이며, 1989년 8월 17일 경찰이 작가를 체포하면서 그림을 압수했다. 국가보안법상 이적표현물이라는 것이었고, 기소는 그해 9월이었다.
1심과 2심은 무죄였는데, 1998년 3월 대법원이 이적표현물에 해당한다며 파기환송했고, 1999년 8월 환송심에서 징역 10개월 선고유예와 함께 작품 몰수가 선고됐다. 그해 11월 확정. 그림의 소유권이 국가로 넘어갔다.
2004년 3월 16일, 유엔 자유권규약위원회가 개인통보 사건 「신학철 대 대한민국」에 대한 견해를 채택했고, 자유권규약 제19조 제2항과 제3항을 어겼다는 것, 곧 표현의 자유를 침해했다는 것이다. 유죄판결을 무효로 하고 보상하라고 권고했으며, 그림은 원래대로 복구해 돌려주라고 했고, 90일 안에 이행 결과를 통보하라는 요구가 붙었다.
이행되지 않았다. 그림은 서울중앙지검 창고에 "영구 보존"됐고, 2018년 1월 26일 문화체육관광부가 검찰로부터 위탁받아 국립현대미술관으로 옮겼다. 훼손 부위를 점검하기 위해서였다. 반환은 아니었고, 보관처만 바뀌었다.
압수한 지 37년이 지났고, 유엔이 권고한 지 22년이 지났다. 국가보안법 제7조는 그대로다.
사람을 친다
작품보다 사람을 치는 쪽이 효율적일 때가 있고, 그림은 다시 그릴 수 있지만 감옥에서 보낸 여섯 달은 되돌릴 수 없다.
1831년 12월 15일, 주간지 《라 카리카튀르》에 석판화 한 점이 실렸고, 루이 필리프 왕을 라블레의 거인으로 그린 『가르강튀아』이며, 왕은 민중이 바친 세금을 삼키고 그 대가로 특권을 배설한다. 그린 사람은 오노레 도미에였다.
이듬해 2월 23일, 도미에는 인쇄업자와 발행인과 함께 불경죄로 기소돼 징역 6개월과 벌금 500프랑을 선고받았다. 생트펠라지 감옥에 갇혔다가 두 달 반 뒤 정신병원으로 이감돼 11주를 더 보냈고, 1833년 1월에 풀려났다.
1835년 루이 필리프 암살 미수 사건 직후 제정된 이른바 9월법에는 "그림의 유포를 통해 행동으로 전환되는 정치적 의견"을 겨냥한 조항이 명시적으로 들어갔고, 사실상 정치 캐리커처를 금지했다. 발행인 필리퐁은 그해 8월 《라 카리카튀르》를 폐간했고, 도미에는 이후 부르주아 풍속 풍자로 방향을 틀었다. 정치 만평이 법조문에 별도의 규제 대상으로 이름을 올렸다. 국가가 이미지의 정치적 위력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순간이다.
귀스타브 쿠르베의 경우는 액수가 남아 있고, 그는 1871년 파리코뮌에 참여했으며, 4월 5일 예술가연맹의 첫 회의를 조직해 의장을 맡았다. 코뮌은 4월 12일 방돔 광장의 기둥을 철거하겠다고 포고했고, 그가 파리 6구 대의원으로 뽑힌 것은 그 나흘 뒤인 4월 16일이다. 기둥은 5월 16일에 넘어갔고, 쿠르베는 그 기둥을 두고 "일체의 예술적 가치가 없으며" "전쟁과 정복의 관념을 영속화한다"고 했다.
코뮌이 진압되자 그는 6월 7일 체포됐고, 8월 14일 군사법정에서 징역 6개월과 벌금 500프랑을 선고받았다. 여기까지는 도미에와 비슷하다.
진짜 처벌은 6년 뒤에 왔고, 1877년 5월 국가는 방돔 기둥 재건 비용 32만 3천 프랑을 쿠르베 개인에게 부과했으며, 연 1만 프랑씩 33년 분할 납부였다.
그는 파산을 피해 이미 1873년 스위스로 망명한 상태였고, 1877년 12월 31일 라투르드페일츠에서 죽었으며, 기둥은 1874년에 이미 재건되어 원래대로 서 있었다. 작품이 아니라 예술가의 생애 전체가 배상 대상이 된 셈이다.
케테 콜비츠는 다른 방식으로 압박받았고, 1898년 대베를린미술전에 『직조공 봉기』 연작을 출품했을 때 아돌프 멘첼이 금메달 후보로 추천했으나 빌헬름 2세가 재가를 거부했고, 그가 프로이센 예술아카데미의 첫 여성 정교수가 된 것은 1919년이다.
1932년 6월, 콜비츠는 아인슈타인·하인리히 만과 함께 사회민주당과 공산당의 통합 후보명부를 촉구하는 『긴급 호소』에 서명했다. 이듬해인 1933년 2월 15일, 나치가 집권한 직후 그는 아카데미에서 사임 요구를 받고 축출됐고, 그 서명이 사유였다.
1933년 봄부터 제국 전역에서 그의 전시가 금지됐고, 작품은 퇴폐미술로 분류됐다. 1936년 7월에는 게슈타포가 찾아와 반나치 예술가 명단을 대라며 강제수용소 송치를 위협했다. 그는 응하지 않았고, 이후 청산가리를 지니고 다녔다고 전해진다.
그의 아들 페터는 1914년 10월 벨기에 에센에서 전사했고, 손자 페터도 1942년 2차대전에서 전사했다. 같은 이름을 두 번 잃고, 콜비츠는 종전을 16일 앞둔 1945년 4월 22일에 죽었다.
다비드 알파로 시케이로스는 형량이 가장 무겁고, 1960년 8월 이른바 사회해체죄로 체포됐으며, 대통령을 비판하고 파업 노동자와 교사의 구속에 항의하는 시위를 주도한 것이 사유였다. 1962년 3월 유죄 판결과 함께 징역 8년. 감옥에서도 계속 그렸고, 1964년 7월 대통령 사면으로 풀려났다.
몸을 치는 방식은 20세기 후반에도 사라지지 않았고, 사진가 유진 스미스는 1971년 일본 미나마타에 들어가 3년을 살면서 수은 중독 피해자들을 기록했고, 1972년 1월 7일 그는 칫소 공장 관계자들에게 집단 폭행을 당해 시력에 심각한 손상을 입었다.
회로를 친다
작품도 사람도 건드리지 않고 목적을 이루는 방법이 있고, 작품이 사람에게 닿는 길목을 막으면 된다.
가장 극단적인 사례는 미국 남부에서 나왔고, 새뮤얼 그린은 메릴랜드 도체스터 카운티에 살던 자유 흑인 목사였으며, 1857년 그는 재판을 받았다. 죄목은 『톰 아저씨의 오두막』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고, 적용된 법은 1841년 메릴랜드 법 제272장이었다. 자유 흑인이 노예제 폐지 관련 문서를 지니지 못하게 한 조항이며, 검사는 이 책이 "선동을 의도한" 것이라고 논고했다.
그린은 일반 선동문서 소지 혐의로는 무죄를 받았지만, "유색인 사이에 불만을 조장하기에 적합한" 『톰 아저씨의 오두막』을 소지한 것은 중죄로 유죄가 됐다. 1857년 5월 14일부터 메릴랜드 주립교도소에서 10년형이 시작됐고, 1862년 3월 브래드퍼드 주지사가 60일 안에 주를 떠나는 조건으로 사면했다. 5년을 복역한 뒤였다.
같은 시기 앨라배마 모빌에서는 이 책을 팔았다는 이유로 서적상이 마을에서 쫓겨났고, 버지니아대학 학생들은 책 화형식을 조직했으며, 해리엇 비처 스토에게 배달된 협박 우편물 중에는 노예의 잘린 귀가 든 소포가 있었다.
한국의 사례는 방식이 더 현대적이며, 영화 「또 하나의 약속」은 삼성 반도체 노동자 황유미의 죽음과 그 아버지의 싸움을 다룬 작품이다. 제작비 22억 원 가운데 상당 부분을 크라우드펀딩으로 모았고, 엔딩크레딧에는 개인 투자자 약 8천 명의 이름이 올랐다.
2014년 2월 6일 개봉을 이틀 앞두고, 메가박스는 배정 예정이던 스크린을 24개에서 3개로 줄였고, 일부 예매는 취소되고 환불됐다. 개봉일 전체 스크린 수는 159개로 그날 상위 10위권 영화 가운데 가장 적었는데, 좌석점유율은 29.9%로 1위였다. 자리는 찼는데 자리가 없었다. 롯데시네마는 이 문제로 공정거래위원회 조사를 받았다. 삼성은 2월 23일 공식 뉴스룸에 「영화가 만들어 낸 오해가 안타깝습니다」라는 글을 올렸다.
이 이야기의 결말은 두 갈래이며, 한쪽에서는 2018년 11월 23일 삼성전자가 공식 사과하고 조정 합의가 이뤄졌다. 김기남 사장의 사과문에는 "건강유해인자에 의한 위험에 대해 충분하고 완전하게 관리하지 못했습니다"라는 문장이 들어갔다. 황유미의 아버지 황상기는 손글씨로 쓴 답사에서 "그 어떤 사과도 충분할 순 없을 겁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의 사과를 삼성전자의 다짐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라고 했다.
다른 한쪽에서는 2019년 산업기술보호법이 개정됐고, 국가핵심기술 관련 정보의 공개를 금지하는 조항이 신설됐으며, 2020년 2월 19일 서울행정법원은 이를 근거로 반도체 공장의 작업환경측정보고서를 비공개하라고 판결했다. 반올림과 대책위가 3월 5일 헌법소원을 낸 날은 황유미의 13주기 하루 전이었다. 영화가 열어놓은 문을 입법이 되닫았다.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도 같은 계열이며, 2014년 부산국제영화제가 세월호 참사를 다룬 다큐멘터리 「다이빙벨」을 상영했고, 그 뒤 이용관 집행위원장은 사퇴 종용을 받았으며, 영화제 예산은 삭감됐다.
공식 확인은 4년 뒤에 나왔고, 2018년 1월 블랙리스트 진상조사위원회는 박근혜 청와대가 부산시장에게 이용관 인사조치를 요구했다고 발표했고, 명단에 오른 문화예술인은 9,473명이었다.
2024년 1월 24일, 파기환송심이 열렸다. 김기춘에게 징역 2년, 조윤선에게 징역 1년 2개월이 선고됐으며, 양측이 재상고를 포기해 그대로 확정됐다.
발주자가 검열자일 때
여기서 이야기가 복잡해진다. 반격이 늘 바깥에서 오지는 않기 때문이다.
1930년대 미국의 뉴딜은 국가가 예술을 공공재로 다룬 역사상 최대 규모의 실험이었고, 1935년 8월 29일 발족한 연방예술프로젝트는 약 1만 명의 예술가를 주급 23달러 60센트로 고용했다. 미술관이 없던 지역에 전국 100곳 넘는 커뮤니티 아트센터를 세워 무료 미술교육을 공급했고, 이 급여로 잭슨 폴록과 마크 로스코와 윌렘 데 쿠닝과 제이컵 로런스가 생존했다.
지난 글에서 다룬 도로시아 랭의 사진도 이 흐름 안에 있고, 그는 연방 재정착청, 나중의 농업안전국 소속이었으며, 바로 그 기관 안에서 다른 일이 벌어졌다.
농업안전국 사진국을 이끈 로이 스트라이커는 마음에 들지 않는 네거티브에 펀치로 구멍을 뚫었고, 인화하면 얼굴이나 풍경 위에 검은 원반이 떠 있는 이미지가 된다. 의회도서관은 이 관행을 이렇게 기술한다. "거부된 이미지는 '킬(killed)'로 분류됐다. 프로젝트 초기 단계에서는 킬 네거티브에 때때로 구멍을 뚫었으나 이후 이 관행은 폐기됐다."
이 관행에는 과장된 통설이 따라다니고, 널리 인용되는 "27만 컷 중 10만 컷"이라는 숫자는 의회도서관의 집계와 맞지 않는다. 소장 흑백 네거티브가 약 17만 5천 컷이고, 의회도서관 용례에서 '킬'은 당시 인화되지 않은 네거티브 전체를 가리키는 분류어다. 구멍이 뚫렸다는 뜻이 아니고, 구멍 뚫기는 초기의 35mm 필름 일부에만 적용됐다.
실제로 구멍 뚫린 네거티브를 세어 영상 작품으로 만든 작가 윌리엄 E. 존스의 집계는 약 3천 컷이고, 의회도서관 온라인 목록에서 "농업안전국 직원이 뚫은 구멍이 네거티브에 있다"는 주석이 붙은 항목을 검색하면 4222건이 나온다. 숫자는 통설보다 작지만, 사진가들이 받아들인 무게는 작지 않았다. 벤 샨은 1964년 4월 14일 스미스소니언 미국미술아카이브 구술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고백하자면 로이는 편집에서 좀 독재적인 데가 있었고 내 사진을 꽤 많이 망쳤습니다. 나중에는 그만뒀지만요. 그는 네거티브에 구멍을 뚫곤 했습니다. 그중엔 믿기 어려울 만큼 값진 것도 있었어요. 그는 그때는 몰랐던 겁니다."
그가 예로 든 것은 1935년 아칸소 마크드트리에서 찍은 상점 사진이었고, 가게 앞에 세제 가루로 물건 값이 적혀 있었다. 전쟁 중 물가 정책 자료로 쓰려고 그 네거티브를 찾았을 때는 이미 구멍이 뚫려 있었다.
"이건 1935년의 삶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주는 더없이 값진 기록이었는데, 1943년인가 44년에 찾으러 갔더니 이미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편집자 에드윈 로스캄은 1965년 구술사에서 더 직설적이었고, 모든 것을 보존할 수는 없다는 점은 인정하면서도, "네거티브에 구멍을 뚫는 방식은 나에게는 야만적이었다"고 했다. 이유는 이것이다. "어떤 사진이 언제 살아날지는 알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같은 기관에서 1936년에는 다른 사건도 터졌고, 스물한 살의 사진가 아서 로스타인이 사우스다코타 펜닝턴 카운티에서 볕에 바랜 소 두개골을 발견해 갈라진 땅 위에 놓고 여러 컷을 찍었다. 그는 나중에 이렇게 썼다. "질감과 그림자를 실험하면서 여러 번 노출한 뒤, 다른 효과를 얻으려고 두개골을 3미터쯤 떨어진 선인장 근처 풀밭으로 옮겼다."
그해 8월, 대선 국면에서 노스다코타의 신문 《파고 포럼》이 이 사진들을 나란히 놓고 "가뭄 조작"이라고 폭로했고, 루스벨트의 가뭄 시찰 열차가 비스마르크에 들어올 때 객실마다 그 신문이 놓여 있었다. 기사는 두개골을 "사진에 으스스한 맛을 더하고 싶은 이들에게 유용한 이동식 소품"이라고 불렀다. 8월 29일, 스트라이커의 조수 에드 로크가 상관에게 편지를 썼다.
"일이 더 커지면 아마 당신에게 연락이 갈 겁니다. 그러니 그 빌어먹을 두개골을 아직 갖고 있거든, 제발 좀 숨기세요."
로스타인이 가뭄 지역으로 떠나기 한 달 전인 그해 7월 14일, 같은 에드 로크가 그에게 촬영 지시서를 보냈다. 물이 필요한 가축, 이주하는 궁핍한 가족, 아이들 사진, 말라 죽은 작물, 문 닫은 농장, 교회를 오가는 사람들. 가져올 그림의 목록이 미리 적혀 있었다. 같은 편지에 이런 문장도 있다. "폴이 말하기를 그 지역 소들은 겨울을 잘 났고 갈비뼈가 드러나거나 혀가 말라 튀어나온 놈은 없다더군요. 놀랄 일도 아닙니다. 여기 있으면 늘 실상을 과장해서 생각하게 되니까요."
발주자는 원하는 이미지를 지정해 놓고 그 이미지가 실제와 다를 수 있다는 것도 스스로 알고 있었다. 이것은 바깥에서 온 반격이 아니라 안에서 벌어진 조율이지만, 결과는 같다. 어떤 이미지는 남고, 어떤 이미지는 사라진다.
반격이 지표가 되려면
여기까지 오면 반격의 크기로 예술의 무게를 재자는 이 글의 제안에 반론이 붙는다. 소련에서 벌어진 일을 보면 그 제안은 곧바로 무너지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1932년 4월 23일,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은 문학·예술 조직들을 해산하고 단일 작가동맹으로 통합하는 결의를 채택했다. 2년 뒤인 1934년 8월 17일부터 9월 1일까지, 모스크바 노동조합회관 원주홀에서 제1차 전연방 소비에트작가대회가 열렸고, 의결권을 가진 대의원이 376명, 발언권만 가진 대의원이 215명이었다. 이 대회에서 채택된 작가동맹 규약에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정의가 실렸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소비에트 문학과 문예비평의 기본 방법으로서, 예술가에게 현실을 그 혁명적 발전 속에서 진실하고 역사적으로 구체적으로 묘사할 것을 요구한다."
여기서 걸리는 대목은 "혁명적 발전 속에서"이며, 눈앞의 현실 대신 도달해야 할 미래를 이미 있는 것처럼 그리라는 지시이고, 이 방법을 따르지 않은 결과는 가혹했다.
1936년 1월 28일 《프라우다》는 무기명 사설 「음악 대신 혼돈」으로 쇼스타코비치의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을 형식주의적이고 부르주아적이며 저속하다고 단죄했고, 쇼스타코비치는 교향곡 4번의 초연을 스스로 철회했다.
연출가 프세볼로드 메이에르홀트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정면으로 반대했고, 1938년 1월 8일 그의 극장이 폐쇄됐다. 1939년 여름에 체포됐고, 1940년 2월 1일 총살형을 선고받아 이튿날 처형됐다.
1946년 8월 14일에는 「잡지 즈베즈다와 레닌그라드에 관하여」 결의가 나왔다. 안드레이 즈다노프는 안나 아흐마토바를 두고 "수녀도 아니고 창녀도 아닌, 아니 차라리 음행과 기도가 뒤섞인 창녀이자 수녀"라고 했다. 아흐마토바와 미하일 조셴코는 9월 4일 작가동맹에서 제명됐고, 노동자 배급카드를 잃었다.
1934년 대회에 참석했던 대의원 가운데 182명이 이후 몇 해 사이 감옥과 굴라크에서 죽었다. 38명이 더 탄압을 받고 살아남았고, 1954년 제2차 대회 때까지 생존한 사람은 123명이었다.
반격의 강도만 놓고 보면 소련 쪽에 견줄 데가 없다. 그러면 "반격이 클수록 작품이 중요하다"는 명제는 무너지는 것처럼 보인다.
왜 처벌받았는가
자세히 보면 처벌의 사유가 정반대다.
도미에는 왕을 풍자해서 처벌받았다. 쿠르베는 코뮌에 참여해서, 콜비츠는 나치에 반대하는 호소문에 서명해서, 시케이로스는 대통령을 비판해서 처벌받았다. 이들은 모두 권력을 향해 무언가를 말했기 때문에 대가를 치렀다.
소련 쪽은 다르다. 쇼스타코비치는 《프라우다》가 오페라를 형식주의로 몰아서, 메이에르홀트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정면으로 반대해서, 아흐마토바와 조셴코는 즈다노프의 결의에 이름이 올라서 처벌받았다. 권력을 비판해서가 아니라 권력이 정한 형식을 따르지 않아서다. 화살표의 방향이 반대다.
'사회적 리얼리즘'과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두 글자 차이지만 권력관계는 정확히 뒤집혀 있다. 앞의 것은 콜비츠가 그랬듯 아래에서 위를 향해 비판하고, 뒤의 것은 작가동맹 규약처럼 위에서 아래로 명령한다. 영국 테이트 미술관의 미술용어 사전은 사회적 리얼리즘 항목에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는 문장을 따로 적어둘 만큼 이 오해가 흔하다.
문장 두 개를 나란히 놓으면 차이가 바로 보이며, 한쪽은 "현실을 그 혁명적 발전 속에서 묘사하라"고 했고, 다른 쪽은 고야가 판화에 적은 "나는 그것을 보았다"이다. 하나는 보이지 않는 것을 그리라 하고, 다른 하나는 본 것을 그렸다고 말한다.
이 구분이 한국에서 특히 중요한 이유가 있으며, 1980년대 민중미술을 다룰 때 "리얼리즘 미술은 곧 사회주의이고 북한식 미술"이라는 등식이 사실상 검열의 논리로 작동해왔기 때문이다.
1985년 7월 20일, 서울 종로구 경운동 아랍미술관에서 열리던 《1985년, 한국미술, 20대의 '힘'》 전시에 경찰이 들이닥쳤다. 전시된 작품을 강제로 철거해 실어갔고, 작가 19명이 연행됐다. 철거된 작품 수는 기록에 따라 24점과 36점으로 엇갈리며, 검찰의 판단은 "전시된 작품 일부가 예술작품이라기보다 선동을 목적으로 한 포스터"라는 것이었다.
그해 11월 22일 민족미술협의회가 창립됐고, 초대 대표는 임옥상이었다. 이듬해 인사동에 문을 연 전시공간의 이름은 '그림마당 민'이었고, 당국의 탄압을 피하려고 '민중'에서 앞 글자만 뗀 이름이다. 이 공간은 8년 동안 300여 회의 전시를 열고, 1994년 재정난으로 문을 닫았다.
처벌의 사유를 기준으로 보면 한국의 민중미술이 어느 계보에 속하는지는 분명하다. 이들은 권력이 정한 양식을 따르지 않아서가 아니라, 권력을 향해 말했기 때문에 처벌받았다. 콜비츠와 시케이로스 쪽이지 즈다노프 쪽이 아니다.
배신할 수 있었느냐
그렇다면 국가가 돈을 댄 예술은 전부 선전인가. 이 글에서 다룬 사례들만 봐도 아니다.
멕시코 벽화운동은 1921년 오브레곤 정부의 초대 공공교육부 장관 호세 바스콘셀로스가 국가사업으로 시작했고, 문맹률이 높은 사회에서 벽 자체를 교과서로 삼겠다는 발상이었다. 리베라가 록펠러센터를 맡을 수 있었던 것도 이 국가사업이 만들어준 국제적 명성 덕분이다. 1923년 12월에 서명된 화가·조각가 조합 선언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이젤 회화와 극도로 지적인 서클의 모든 예술을 배격한다. 그것이 귀족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기념비적 예술의 표현을 찬양한다. 그것이 공공의 소유이기 때문이다."
『게르니카』도 마찬가지이며, 스페인 공화국 정부가 1937년 1월 파리 만국박람회 스페인관 벽화로 위촉하고 15만 프랑을 지급했다. 게르니카 폭격은 그해 4월 26일에 일어났고, 피카소는 5월에 착수해 6월 4일 완성했다. 국가가 발주한 자리에 국가가 자국민을 공중폭격으로 학살한 사건이 걸렸다. 농업안전국 사진도 국가 고용이었다.
그러니 발주자가 누구냐로는 아무것도 판별되지 않고, 갈림길은 다른 데 있으며, 작가가 발주자를 배신할 수 있었느냐다.
리베라는 록펠러의 벽에 레닌을 그려 넣었고, 그래서 벽화가 부서졌다. 농업안전국 사진가들은 사진국장의 편집 방식에 항의해서 결국 구멍 뚫기를 멈추게 했다. 피카소는 스페인에 자유와 민주주의가 회복되기 전에는 『게르니카』를 돌려보내지 말라는 조건을 걸었고, 그 그림은 프랑코가 죽고 민주화 이행을 거친 1981년 9월에야 스페인 땅을 밟았다. 소련에서는 그 배신이 총살로 끝났다. 그것이 국가가 돈을 댄 예술과 국가가 형식을 강제한 예술을 가른다.
도끼 앞에 선 사람
다시 디트로이트로 돌아간다. 록펠러센터의 벽화는 부서졌고, 디트로이트의 벽화는 남았다. 갈린 것은 작품의 힘이 아니라 에드셀 포드와 발렌티너가 버티기로 했다는 사실이었다. 같은 일이 여러 번 있었다.
1972년 6월, AP 사이공 지국에는 나체 아동 사진을 송고하지 않는다는 불문율이 있었고, 사진부장 호르스트 파스는 그 규정을 뚫고 판티김푹의 사진을 송고하라고 지시했다. 규정을 어긴 사람이 그 사진을 세상에 내보냈다.
2005년 6월, 광주인화학교의 교직원 전응섭은 학교 안에서 벌어진 일을 장애인성폭력상담소에 제보했다. 그 제보가 없었으면 소설도 영화도 없었고, 2011년의 법 개정도 없었다.
농업안전국 사진가들은 상관의 편집 방식에 계속 항의했고, 그래서 1939년 무렵 구멍 뚫기가 멈췄으며, 그 뒤에 찍힌 사진들은 살아남았다.
아일린 미오코 스미스는 1998년 「도모코의 목욕」의 저작권을 유족에게 넘겼고, 그가 남긴 말은 이렇다. "이 사진이 도모코를 기리지 않는다면 아무 의미도 없을 것이다. 도모코와 그 가족의 뜻에 반해 계속 발행된다면 이 사진은 신성모독이 될 것이다." 이 경우 지키기로 한 것은 사진이 아니라 사진에 찍힌 사람이었다.
예술이 정치를 바꾼다는 명제는 절반만 맞고, 누군가 지키기로 해야 예술이 살아남고, 살아남아야 무언가를 바꾼다. 아무도 지키지 않은 작품은 바꿀 기회조차 얻지 못한다.
도끼는 언제나 이긴다. 도끼를 막는 것은 그 앞에 서기로 한 사람뿐이다.
2014년 8월, 홍성담은 광주비엔날레 특별전에 걸릴 예정이던 「세월오월」을 스스로 내렸다. 광주시가 수정을 요구하고, 전시가 유보된 뒤였다. 그가 남긴 말이 오래 남는다.
"과거에는 독재권력에게 내 작품이 유배됐다면 지금은 지자체 권력에 유배됐다."
신학철의 「모내기」는 지금도 국립현대미술관 수장고에 있고, 압수된 지 37년째다. 그 그림을 그린 사람은 여전히 반환을 요구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