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이 도시는 왜 존재하는가

URL복사

국가가 사진가를 고용해 시대를 기록하게 했을 때, 대본은 누가 썼는가

이 도시는 왜 존재하는가

 

1938년 10월 17일, 워싱턴의 공무원 로이 스트라이커가 펜실베이니아의 탄광 도시 셰넌도어로 떠나는 사진가 셸던 딕에게 편지를 썼다. 첫 문장부터 카메라를 만지지 말라고 한다. 걷거나 차로 몇 바퀴고 돌면서 사람들과 상점을 보고 "주유소와 술집에서 귀를 기울이"라는 것인데, 그렇게 하루를 보낸 다음 호텔로 돌아가 한 가지 질문에 답을 써 보라고 했다.

 

"이 질문에 답을 써 보십시오. '이 도시는 왜 존재하는가?' 그것을 한 뒤에야 상세한 촬영 대본을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나무랄 데 없는 취재 방법론인데, 편지는 곧 답을 미리 정해주는 쪽으로 넘어간다. 스트라이커는 자기가 그곳에 가봤을 때 무엇을 보았는지 늘어놓는데, 산간 계곡 아래로 내려앉은 도시이고 어디를 보아도 "인간이 만든 황폐, 폐석 더미, 헐벗은 언덕, 더러운 거리"라는 것이다. 그러고는 사진이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까지 지정한다.

 

"다시 말해 이곳은 탄광 도시이고, 당신 사진은 그것을 말해야 합니다. 이곳은 교회가 지배하는 장소입니다. … 이곳은 번영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술집과 거리에서 하릴없이 서성입니다. 당신은 이 실업의 감각을 잡아내야 합니다."

 

무엇을 찍을지가 아니라 무엇을 느끼게 할지가 지시돼 있는 셈인데, 인물 촬영 대목에 가면 그 성격이 더 뚜렷해진다. 젊음의 편에 있는 감정을 붙잡고 "그들 처지의 절망을 그려내" 보라면서 붙잡을 소재까지 나열해주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젊음의 혼란—술, 스윙, 섹스, 그리고 더 많은 술" 같은 것들이다. 그렇게 지시를 늘어놓은 끝에 편지는 한 줄로 닫힌다. "실제 세부는 당신이 직접 풀어내야 합니다."

 

편지를 쓴 사람도 받은 사람도 미국 연방정부 직원이었으니, 국가가 예산을 들여 사진가를 고용하고 시대를 기록하게 한 사업의 문서인 셈이다.

 

이 사업의 뿌리는 1935년 4월 30일 루스벨트가 행정명령 7027호로 세운 이주정착국인데, 대공황과 가뭄으로 무너진 농촌을 다시 세우자는 기관이었다. 행정경비로 25만 달러가 배정됐고 농무부 차관 렉스퍼드 터그웰이 행정관을 맡았으며, 명령문에는 "추가 보수는 지급하지 않는다"는 단서가 붙었다.

 

터그웰은 컬럼비아 대학에서 경제학을 가르치던 시절 경제학 입문서를 함께 만들며 사진을 자료로 쓰는 법을 익힌 강사가 하나 있었는데, 그가 로이 스트라이커다. 터그웰이 워싱턴으로 가자 스트라이커도 따라갔다.

 

여기서 눈여겨볼 것이 그의 직함이다. 사진과장이 아니었다. 1935년 12월 6일자 편지의 서명란은 "Roy E. Stryker / Chief, Historical Section / Division of Information", 그러니까 정보부 소속 역사과 과장으로 돼 있다. 훗날 구술에서 그는 자기 일이 "훗날 농업안정국의 역사에 어떤 관련이 있을 수 있는 문서와 자료를 수집하는 것"이었다고 설명했는데, 그 설명 어디에도 사진은 없다. 그 자신이 그 점을 인정한다.

 

 

"직무기술서를 읽어보면 거기에는 사진의 역할이나 사진 부서가 생길 것이라는 데 대한 강조가 거의 없습니다. 우리는 출발해야 했던 지점에서 아주 멀리 벗어났습니다. 결국 우리가 한 일은 문서는 적고 사진은 많은 상태로 끝난 것입니다."

 

문서를 모으라고 만든 자리에서 사진이 나왔다는 뜻이다. 부서 자체도 기관을 세 번 갈아탔는데, 이주정착국(1935~1937)에서 농업안정국(1937~1942)으로, 다시 전시정보국(1942~1944)으로 옮겨 다니다가 1944년에 남은 것 전부가 의회도서관으로 넘어갔다.

 

하루 5달러

 

국가가 예술을 지원할 때 실제로 무엇이 오가는지는 예산 문서에 남는다. 1936년 4월 6일 스트라이커가 사진가 테오도어 융에게 쓴 편지에는 하루치 단가가 적혀 있는데, "당신이 거기 있는 하루하루가 우리에게 5달러씩 듭니다"라는 문장이 그것이다. 비 오는 날은 늘 있으니 맑은 날에는 더 밀어붙이라는 말이 뒤따른다.

 

일주일 뒤 편지에는 총액이 나오는데, 현장에 사진가 한 명을 두는 데 일당과 여행비를 합쳐 약 700달러가 드니 매달 좋은 사진을 많이 확보해야 하고, 그러지 못하면 "이주정착국에게는 분명한 손실 사업이 됩니다"라고 그는 썼다. 사진가를 비용으로 계산하고 산출로 회수하는 구조다.

 

평가 기준도 두 항목으로 명문화돼 있었다. 사진의 질, 그리고 제출하는 양이다. 스트라이커는 여름철에 자신이 엄한 감독자가 될 것 같다고 미리 경고하면서 사진에 대한 논평 쪽지를 자주 받게 될 것이라고 했고, "모든 사진가가 동일한 절차를 받습니다"라는 말로 그것이 개인적 불신이 아님을 분명히 했다.

 

고용 형태도 이 계산에 맞춰져 있었다. 이 부서에 관여한 사진가가 마흔 명이 넘는데 전임은 열세 명뿐이었고, 나머지는 단기 계약을 반복 갱신하거나 연방정부의 다른 자리를 가진 채 사진을 찍었다. 여행비는 매달 1일에 그 달분으로 유보됐다가 쓰지 않으면 소멸했는데, 스트라이커가 셸던 딕에게 보낸 추신이 그 사정을 짧게 요약한다 — "그 돈에 대한 청구를 넣지 않으면 소멸될 수 있고, 아예 받지 못할 가능성도 있음을 알 수 있을 겁니다."

 

이 사업의 핵심 도구는 '촬영 대본(shooting script)'이라 불린 문서, 곧 무엇을 찍을지 미리 적은 목록이었다. 1938년 1월 스트라이커가 상급자에게 보낸 메모에 그 정의가 있는데, 스토리의 논리적 전개를 따라가는 "일련의 간결한 유도 어구 또는 문장"으로 자료를 취합하는 사람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알려주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한계도 함께 적었다. "사진은 관념을 상징할 수 있으나 그것을 사실적으로 예시하지 못하는 일이 아주 많다." 그런데 이 사업의 성격을 통째로 드러내는 문장은 따로 있는데, 부서가 만든 직무 문서가 현장 배치 절차를 다섯 단계로 적어놓고 마지막 항목에서 이렇게 쓴다.

 

"'촬영 대본'은 현장이 아니라 워싱턴에서 작성된다. 따라서 대본에서 발견한 차이를 실제에 맞추어 조정하는 것은 사진가에게 달려 있다. 원래 개요에서 구상된 많은 것들은 촬영 가능하지 않다."

 

발주와 결과가 어긋난다는 사실이 제도 설계 안에 이미 적혀 있었던 것이다. 국가는 지시를 내리면서 그 지시가 현장에서 맞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고, 그 어긋남을 조정하는 책임은 개인에게 넘겼다.

 

같은 문서는 그 개인에게 요구되는 자질도 규정한다. 사진가는 "상당 부분 사회과학자여야" 하고 편향된 정보와 사실을 구별할 수 있어야 하며, 농촌 건축에서 트랙터 구조까지 폭넓은 지식을 갖춰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열거한 끝에 문서는 그를 이렇게 정의한다 — "그는 카메라를 수첩으로 삼은 사회 조사원이다." 마지막 요구가 인상적인데, "그는 렌즈와 셔터에 능한 만큼이나 연필과 수첩에도 능해야 한다"고 했다.

 

무엇을 찍으라 했는가

 

대본의 실물을 보면 지시의 밀도를 알 수 있는데, 의회도서관이 공개한 촬영 대본 가운데 가장 긴 것이 1939년 10월에 작성된 스무 쪽짜리 「작은 도시(The Small Town)」다.

 

서문은 방법론으로 시작한다. 인구 약 5,000명의 도시들을 신중하게 골라 집중하자는 것이고, 그 도시들은 "각자 위치한 지리적 지역을 대표하는 교차로 도시"여야 한다. 그리고 질문을 던지는데, 미국인 대다수가 같은 라디오를 듣고 같은 영화를 보고 전국 광고에 노출된다면 앨라배마의 도시와 버몬트나 몬태나의 도시를 구별할 수 없다는 뜻이냐고 묻는다. "이 도시들에서 삶의 공통분모는 무엇인가? 그것을 카메라로 유의미하게 묘사할 수 있는가?"

 

질문은 사회학적이지만 그 뒤에 이어지는 것은 촬영 지시다. 대로와 상점, 극장, 은행, 식당, 호텔, 차고, 주유소, 교회, 학교, 유틸리티, 관공서까지 스물두 개 항목이 나열되고 각 항목 아래로 세부가 붙는다. 거리 항목의 세부는 이런 식이다 — "할 일 없이 어울려 이야기하는 남자들 / '토요일 오후' / 진창 구경 / 남자들을 기다리는 여자와 아이들."

 

가정 항목은 계급을 명시적으로 요구한다. 집 외관을 찍되 "더 나은 유형의 주거 지역과, 더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지역을 함께 보여줄 것"이라고 적었다. 그다음에 저녁 시간에 대한 항목이 하나 있는데, "사람들은 저녁을 어떻게 보내는가?"라는 물음 아래 여덟 가지가 번호로 붙는다. 식사와 요리, 옷차림, 라디오 듣기, 브리지 같은 놀이, 아이와 놀아주기, 파티와 손님, 재봉틀, 아기 돌보기. 국가가 남의 집 저녁 시간을 여덟 항목으로 쪼개 발주한 것이다.

 

기타 항목에는 촬영 난이도까지 적혀 있다. 열일곱 번째가 "'도시의 끝' – 도시와 시골이 만나는 곳"인데 괄호를 열어 "보여주기 어려운 대상"이라고 덧붙였고, 열아홉 번째는 지시가 훨씬 분명해서 "'판자촌' – 각 도시의 슬럼 사진을 확보하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썼다. 그에 비해 지역 산업 항목은 한 줄뿐이다. "무엇이 이 도시를 돌아가게 하는가?"

 

이 대본이 실제로 어떻게 쓰였는지는 부서가 1940년에 쓴 내부 문서가 알려준다. 모든 사진가가 상설 소도시 촬영 대본을 지니고 다녔는데, 오하이오의 사업을 취재하러 가든 텍사스의 이주민을 취재하러 가든 그 대본은 주머니에 있었고 자주 읽어 상당 부분 머릿속에 들어 있었다는 것이다. 문서는 그 결과를 이렇게 묘사한다. "수백 개의 도시를 지나 차를 몰다 보면 그는 대본에 있는 항목들과 맞닥뜨리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낡은 버스를 세우고, 찍고, 다시 간다."

 

소들은 겨울을 잘 넘겼다

 

대본이 현실과 맞지 않은 순간도 문서에 남았다. 1936년 7월 14일 부서의 에드윈 로크가 사진가 아서 로스스타인에게 가뭄 지역 취재 지시를 보내면서 여섯 항목짜리 간략한 대본을 덧붙였는데, 물과 목초를 필요로 하는 가축, 피난하는 궁핍한 가족들, 아이들, 자라지 못하고 타 버린 작물, 문 닫은 농장들, 교회를 드나드는 군중이 그것이다.

 

기대하는 그림이 무엇인지는 분명한데, 정작 같은 편지에는 그 기대를 스스로 흔드는 대목이 붙어 있다. 로크는 "이 모든 희망적 생각에는 큰 '있다면'이 붙습니다"라고 쓴 뒤, 신문 기사로 보면 로스스타인이 황폐가 절정에 이른 뒤에 들어가는 것 같고 구호 기관들이 이미 활동 중이라 상황은 개선되고 있어야 한다고 적었다. 그러고는 현장에서 온 보고를 그대로 옮긴다.

 

"폴은 그 지역 소들이 겨울을 잘 넘겼고 갈비뼈가 튀어나오거나 혀가 마르고 늘어진 것은 없다고 말했습니다. 놀랍지 않습니다. 이쪽에서는 늘 사태를 과장해 짐작하게 되는 것 같으니까요."

 

본부가 기대한 것과 현장이 보고한 것이 어긋났고, 그 어긋남을 본부가 스스로 적어두었다. 덧붙이자면 이 여정에서 로스스타인은 마른 땅에 놓인 소 두개골을 여러 장 찍었는데, 그 사진들이 각도와 위치를 옮겨가며 촬영됐다는 이유로 이듬해 정치적 논란이 됐다.

 

하루 5달러를 계산해 보여준 그 편지의 수신인 테오도어 융은 그 뒤 어떻게 됐는가. 일주일 뒤 스트라이커가 다시 썼는데, 지금까지 받은 사진들에 매우 실망했다는 통보였다. 신시내티에서 찍은 라이카 인화 두 장과 농장 사진들, 콜럼버스 갱생 사업 사진들을 돌려보낸다고 하면서 책임 소재를 못박았다. "잘못은, 분명히, 당신과 카메라에 있고 인화지에 있지 않습니다."

 

지적은 세 항목이었는데, 하나의 대상을 너무 많이 찍는다는 것과 삼각대를 써야 할 곳에서 카메라를 손에 들고 있는 것 같다는 것, 노출이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농가부채조정을 찍은 8번 필름팩은 "거의 완전한 실패였습니다"라고 했고, 그 뒤에 한 문장이 이어진다.

 

"정말로 그 카메라의 사용법을 이해하고 있습니까?"

 

다만 같은 편지가 그를 깎아내리기만 한 것은 아니어서, 스트라이커는 "모든 사진가 중 누구도 당신보다 좋은 사진을 보는 눈이 낫지 않습니다"라고 쓰고 소재 선택은 훌륭했으며 문제는 카메라 기술인 것 같다고 했다. 그러고는 다시 예산 이야기로 돌아가 결론을 붙인다.

 

"나 역시 수행된 작업으로 내 예산을 정당화해야 하는 처지에 다소 몰려 있다는 것을 압니다. 남으려면 더 많고 더 나은 사진을 내놓아야 합니다."

 

융은 남지 못했다. 정확히 말하면 사진가로는 남지 못했는데, 캡션을 쓰고 팸플릿을 만드는 행정 업무로 옮겨 1943년까지 부서에 있었다.

 

그늘만 기록했다

 

융은 1965년에 구술 인터뷰를 남겼다. 서른 해 전 일을 회고하면서 그는 자기 사진이 "예컨대 로스스타인만큼의 임팩트가 없었다"고 인정했고, 그래서 스트라이커가 자기를 다른 방식으로 쓸 생각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여기까지는 담담하다.

 

 

그가 정말 화가 났던 것은 다른 일, 사진가들이 자기 필름을 직접 현상하지 못하게 한 규칙이었다. 사진의 질을 끌어내려면 찍은 사람이 현상까지 해야 한다고 믿었던 그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었고, 결국 그는 규칙을 어겼다.

 

"나는 이따금 일요일에 암실에 몰래 들어가 내 필름과 밀착 인화를 하고 확대도 좀 했다. 그런데 그가 그것을 알아냈다. 나는 추방되었다."

 

국가가 고용한 사진가가 자기 필름을 만지려고 일요일에 몰래 들어가야 했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이 사업을 프로파간다로 보았느냐는 물음에는 부인했는데, 반대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부르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나는 그것을 정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자유가 없었다고도 하지 않았다. 처리해야 할 확실한 임무가 있었고 그것을 벗어나면 상당히 자기 재량이었으며 지시받은 것 말고도 자신에게 흥미로운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면서, "그 점에서는 상당한 여유와 자유가 있었다"고 했다. 그러니 그의 비판은 통제를 겨눈 것이 아니었고, 지금이라면 무엇을 다르게 하겠느냐는 물음에 그가 한 답이 이 사업 전체에 대한 가장 정확한 비평일 것이다.

 

"물론 우리가 했던 것처럼 그늘만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삼차원적으로, 앞뒤로, 나쁜 것과 함께 좋은 것도. 가난한 계급만이 아니라 중간계급이 어떻게 살았는지도 보여줄 것. 우리는 버림받은 자들, 우울한 인구에만 관심을 두었다."

 

국가가 발주한 것이 곤경이었으므로 기록으로 남은 것도 곤경뿐이었다는 진단이다. 흥미로운 것은 융이 1965년에 아쉬워한 그 일을 1938년에 채용된 사진가가 이미 하고 있었다는 점인데, 매리언 포스트 월콧이다. 두 명의 스승이 스트라이커에게 그를 추천했고 그렇게 해서 그는 이 부서 최초의 전임 유급 여성 사진가가 됐다. 그의 작업은 대공황의 곤경을 피하지 않으면서도 중간계급 생활에 집중한 것으로 평가되며, 그로써 그 시대의 사회경제적 묘사에 더 큰 복잡성을 가져왔다는 것이 현재의 정리다.

 

그가 현장에서 겪은 일은 스트라이커의 회고에 한 토막 남아 있는데, 이따금 곤란한 일이 없느냐고 묻자 월콧이 이렇게 답했다는 것이다. "자주 지역 경찰이 나를 붙잡습니다. 우리는 콜라를 마시고, 그는 자기 성생활에 대해 뭔가를 묻고, 나도 그에게 뭔가를 묻고, 그러다 시계를 보고는 말합니다. 일하러 돌아가지 않으면 해고당할 거예요."

 

십 분

 

이 사업이 남긴 사진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1936년 3월 캘리포니아 니포모에서 도러시아 랭이 찍은 「이주민 어머니」인데, 그날의 사정은 랭 자신이 1960년에 「내가 결코 잊지 못할 임무」라는 글로 남겨두었다.

 

 

그는 한 달 동안 혼자 캘리포니아의 이주 농업노동을 촬영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일은 끝났고, 시간은 다 됐고, 나는 소진돼 있었다." 비가 왔고 카메라 가방은 다 싸여 있었으며 조수석에는 워싱턴으로 보낼 노출된 필름 상자가 놓여 있었으니, 취재는 이미 끝난 상태였다.

 

그런 길가에 '완두 수확자 캠프'라고 적힌 거친 화살표 간판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멈추지 않았고, 본 것을 기억하고 싶지도 않아서 계속 몰며 "그 부름을 무시했다"고 썼다. 그러다 이십 마일을 더 간 뒤에 반대로 했다.

 

"내가 무엇을 하는지 거의 깨닫지도 못한 채, 나는 텅 빈 고속도로에서 유턴을 했다. … 나는 이성이 아니라 본능을 따르고 있었다."

 

캠프에 들어간 뒤의 서술이 이 사진의 전부다. 자석에 끌리듯 한 어머니에게 다가갔다고 했고, 자기 존재나 카메라를 어떻게 설명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녀가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는 것은 기억난다"고 적었다. 촬영은 같은 방향에서 점점 더 가까이 다가가며 다섯 번이었다. 그는 이름도 내력도 묻지 않았고, 대신 여자 쪽에서 몇 가지를 말해주었다. 나이가 서른둘이라는 것, 주변 밭의 언 채소와 아이들이 잡은 새를 먹고 살아왔다는 것, 식량을 사려고 방금 자기 차의 타이어를 팔았다는 것이다. 그 장면을 랭은 이렇게 정리했다.

 

"그녀는 아이들이 몸을 웅크린 그 임시 천막 안에 앉아 있었고, 내 사진이 자기를 도울지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 같았으며, 그래서 나를 도왔다. 거기에는 일종의 대등함이 있었다."

 

그는 다른 천막에는 가지 않았는데, 니포모의 완두 작물이 얼어 아무에게도 일이 없었지만 발이 묶인 다른 수확자들에게는 다가가지 않았는데, "필요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임무의 본질을 이미 기록했다고 판단했기 때문인데, 머문 시간도 그가 적어두었다. "나는 그 캠프에 겨우 10분 있었다. 그러고 나서 카메라를 닫고 곧장 집으로 갔다."

 

다만 노출 횟수는 자료마다 다르다. 랭 자신은 다섯 번이라고 썼고 연구자들은 십 분 사이에 일곱 프레임을 집계했는데, 의회도서관에는 다섯 프레임만 있다. 나머지 둘은 도서관에 도착하지 않았고 오클랜드 미술관의 랭 아카이브에 있다.

 

기록이 성긴 것은 프레임 수만이 아니다. 의회도서관은 그날의 캡션 자료에 대해 "그 특정 사진들에 대한 랭의 언급은 아무리 좋게 보아도 인색하다"고 적어두었는데, 실제로 그가 이 묶음과 함께 제출한 기록은 톰프슨 가족을 찍은 사진 어느 것도 언급하지 않는다. 파일 카드의 캡션은 나중에 신문 보도에서 추려 붙인 것으로 보이고, 그래서 도서관 카드에는 촬영 월이 2월로 잘못 적혀 있다. 세계에서 가장 많이 복제된 다큐멘터리 사진 한 장의 1차 기록이 그만큼 허술하다.

 

그 사람은 내 이름도 묻지 않았다

 

사진 속 여자의 이름은 플로렌스 오언스 톰프슨이다. 1903년 인디언 준주에서 태어났고 부모 양쪽이 체로키계였으며 자녀는 열 명이었다. 그의 신원이 밝혀진 것은 사진이 찍힌 지 마흔두 해 뒤인 1978년인데, 제보를 받은 지역 신문 기자가 모데스토의 이동주택 단지에서 그를 찾아내 사진 속 인물임을 알아봤다. 그가 남긴 말은 짧고 분명하다.

 

 

"그 사람이 내 사진을 찍지 않았더라면 좋았겠다. 나는 그걸로 한 푼도 받을 수 없다. 그 사람은 내 이름도 묻지 않았다. 사진을 팔지 않겠다고 했다. 내게 한 장 보내주겠다고 했다. 결국 보내지 않았다."

 

랭이 기록한 세부 하나는 가족이 부인했는데, 아들 트로이 오언스는 타이어를 팔았을 리 없다면서, 팔 타이어가 없었고 가진 유일한 타이어는 허드슨에 달려 있었으며 그것을 달고 떠났다고 했다. 다만 그는 랭이 거짓말을 했다고 보지는 않았다. "그저 한 이야기를 다른 이야기와 뒤섞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니면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메우려 빌려온 것이겠다."

 

1983년 8월 말 톰프슨이 입원하자 가족이 의료비를 호소했고, 9월까지 편지 2천 통과 함께 3만 5천 달러가 모였다. 그는 9월 16일 여든 살에 세상을 떠났다. 그 일을 겪은 뒤 트로이 오언스가 한 말이 이 사진과 가족의 관계를 요약한다. "엄마와 우리에게 그 사진은 늘 일종의 저주 같은 것이었다. 그 모든 편지가 도착한 뒤에는, 그것이 우리에게 자부심 같은 것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묘비에는 사진의 제목이 이름과 나란히 새겨졌다. "플로렌스 리오나 톰프슨 / 이주민 어머니 — 미국 모성의 강인함에 대한 하나의 전설."

 

톰프슨이 한 푼도 받지 못한 것은 계약이 나빴기 때문이 아니라 계약이 없었기 때문이고, 같은 이유로 랭도 한 푼 받지 못했다.

 

이주정착국의 자금으로 만들어진 사진은 연방정부 저작물로 분류돼 퍼블릭 도메인이 됐으니, 저작권이 아무에게도 없어 사용료를 청구할 근거도 없었다. 랭 본인이 1960년 글에 그 사실을 담담히 적었다. "네거티브는 지금 의회도서관에 속하며, 도서관이 그 사용을 통제하고 인화한다."

 

그런데 권리가 없다는 것이 값이 없다는 뜻은 아니었다. 2005년 소더비 뉴욕에서 리터치되지 않은 인화 32점 세트가 29만 6천 달러에 팔렸고, 1998년에는 랭이 직접 필기하고 서명한 인화가 24만 4천 5백 달러에 낙찰됐다. 이미지에 대한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는데 그 이미지를 담은 물건에는 값이 매겨진 것이다. 랭이 같은 글에 쓴 문장은 이 구조를 다른 각도에서 짚는다.

 

"나는 그것을 창조하지 않았다. 나는 그 크고 오래된 그래플렉스 뒤에 있었고, 그것을 중요한 무언가를 기록하는 도구로 사용했다. … 이제 그것은 그녀의 사진이지 내 사진이 아니다."

 

조직은 없었다

 

지금까지 본 문서들은 이 사업을 촘촘한 지휘 체계로 그리는데, 정작 그 안에서 일한 사람의 증언은 정반대다. 1964년 구술 인터뷰에서 면담자가 랭에게, 연방정부 아래에서 일하며 자기 작업이 특정한 편향과 함께 쓰이는 프로파간다 장치에 개인적으로 반대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랭의 답은 부인이었는데, 그런 문제는 전혀 되지 않았고 "그런 종류의 반응은 결코 없었고, 그것은 아예 그림 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라고 했다. 면담자가 조직과 업무 계획을 묻자 답이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조직을 말씀하시는데, 나는 어떤 조직도 찾지 못했습니다. 업무 계획을 말씀하시는데, 나는 어떤 것도 찾지 못했습니다. … 나는 덥고 습한 초여름에 한쪽에 처박힌 작은 사무실을 발견했고, 거기서는 자기가 무엇을 할지 어떻게 할지를 정확히 아는 사람이 특별히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그것이 비판이 아니라고 못박았는데, 오히려 "아주 특별한 종류의 자유의 분위기 속으로 걸어 들어간 것"이었고 다른 말을 하며 이 부서를 공식적인 빛으로 치장하는 사람은 진실하지 않다고 했다. 촬영 대본과 평가 기준이 문서로 남아 있는 사업을, 정작 그 사업을 대표하는 사진을 찍은 사람은 조직 없는 곳으로 기억한 것이다.

 

그는 국가가 사진가들에게 무엇을 주었는지도 말했는데, 사진가들은 어느 정도 무작위로 뽑혔고 선별되지 않았으며 일하면서 배웠다면서 "미국 정부는 우리 모두에게 훌륭한 교육을 주었습니다"라고 했다. 정부 명찰이 현장에서 무엇이었는지도 설명했는데, 자신이 누구냐는 물음에 그들의 처지에 관심 있는 정부의 대표라고 답하는 것은 사진을 찍고 싶어하는 잡지사에서 왔다고 말하는 것과 "아주 다른 일"이라는 것이다.

 

다만 그가 스트라이커와 다툰 대목도 남아 있다. "로이가 '도러시아, 그건 충분히 모은 것 같아'라고 말한 몇 번의 확실한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는 그것을 두고 논쟁했는데, 서부로 향하는 움직임과 결국 그것이 귀결된 이주노동이 미국에서 매우 혁명적인 일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부에서는 특별히 관심을 두지 않는 시기들이 있었다고 그는 말했다. 랭은 1939년 말 이 부서를 떠났다.

 

십칠만 오천 장

 

1942년 이 부서는 전시정보국으로 넘어가면서 스트라이커의 직함도 "사진부 과장, 출판·그래픽국"으로 바뀌었고 촬영 대상도 바뀌었다. 같은 해 10월 12일 그가 미국철도협회에 보낸 편지에 전환의 방향이 적혀 있는데, "이 시점에 우리는 이 나라의 전쟁 수행에서 철도가 하는 역할을 강조하고자 합니다"라는 것이다. 그러고는 절차 하나를 덧붙였다. "물론 우리는 이 사업에 대해 육군과 연방수사국의 승인을 받을 것입니다."

 

이 무렵 스트라이커가 사진가들에게 "기백이 조금 있는 사람들", "미국을 정말로 믿는 것처럼 보이는 남자·여자·아이들"을 찍으라고 지시했다는 이야기가 여러 문헌에 전한다. 사진가 존 배천이 그 결과물이 "소련에서 온 것들처럼" 보이게 됐다고 말했다는 대목도 함께 인용된다. 다만 그 메모의 원본은 의회도서관이 공개한 촬영 대본 서른 건과 일반 지침 아홉 건 어디에도 없다. 방향이 바뀐 것은 위 철도 편지와 도서관 자체 서술로 확인되지만, 그 문구들은 2차 문헌이 전하는 것으로 읽는 편이 정확하다.

 

1944년, 이 부서가 남긴 것 전부가 의회도서관으로 넘어갔다. 흑백 네거티브가 약 17만 5천 점인데 절반은 안전필름이고 절반은 나이트레이트이며, 인화는 10만 7천 점 이상으로 그중 약 7만 7천 점이 스트라이커의 지휘 아래 만들어진 것이다. 나머지 3만 점은 다른 출처에서 왔고 상당수는 대응하는 네거티브가 없다. 여기에 컬러 원판 1,610점과 마이크로필름 스물세 릴 분량의 문서 기록이 더해진다.

 

이 사진들의 청구번호에는 정보가 부호화돼 있다. 접두어 USF33은 농업안정국 35밀리 원본 네거티브, USF34는 단판 필름, USW3은 전시정보국 시트 필름이고, 뒤에 붙는 여섯 자리는 필름 스트립 번호이며 M2 같은 표시는 그 스트립의 몇 번째 프레임인지를 말한다. 국가가 만든 이미지에는 관리 번호가 붙는다.

 

「이주민 어머니」의 청구번호는 LC-USF34-9058-C인데, 그 옆에 리터치되지 않은 판본이 따로 있다. 1938년 전시를 준비하면서 화면 오른쪽 아래 앞부분에 들어와 있던 톰프슨의 엄지를 지웠기 때문이다. 도서관은 두 판본을 나란히 두고 그 사실을 적어두었는데, 손댄 사진과 손대기 전 사진을 함께 보관하는 것이 이 아카이브가 스스로에게 부과한 규칙이다.

 

 

남은 것

 

이 사업의 문서를 읽고 나면 두 가지가 함께 사실이 된다.

 

국가는 무엇을 찍으라고 지시했다. 사진가에게 도시가 왜 존재하는지 먼저 쓰라고 했고, 실업의 감각을 잡아내라고 했고, 절망을 그려내라고 했고, 판자촌 사진을 확보하라고 했고, 하루 5달러를 계산해 보여주며 더 많고 더 나은 사진을 내놓으라고 했다. 그 지시를 따르지 못한 사람은 사진가 자리에서 밀려났다.

 

동시에 국가는 그 지시가 현장에서 맞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 대본은 워싱턴에서 쓰이고 현장에는 없으며 그 차이를 조정하는 것은 사진가의 몫이라고 부서의 직무 문서가 적어두었고, 소들이 겨울을 잘 넘겼다는 보고도 본부가 스스로 기록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일한 사람은 삼십 년 뒤 "우리는 그늘만 기록했다"고 말했고, 다른 사람은 "어떤 조직도 찾지 못했다"고 말했다. 어느 한쪽만 골라 읽으면 이 사업의 절반을 놓친다.

 

지금 남은 것은 사진이다. 저작권이 없어서 누구도 그것으로 돈을 벌 권리를 갖지 못했고, 같은 이유로 누구나 그것을 쓸 수 있다. 이 기사에 실린 사진도 그래서 실렸다. 국가가 돈을 대서 만든 기록의 마지막 성질이 그것이다 — 아무도 소유하지 못하는 대신 아무도 배제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