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함에 「재사」라고 새겨 넣는 자
1857년 파리에서 『리얼리즘』이라는 제목의 책이 나왔다. 저자는 쿠르베의 친구이자 그 무리의 대변인 노릇을 하던 비평가 샹플뢰리인데, 정작 그 책 서문에는 이런 문장이 들어 있다.
"스스로를 리얼리스트라 부르는 자는 누구든, 명함에 이름 다음에 「재사(才士)」라고 새겨 넣는 자만큼이나 우스꽝스러워 보인다."
책 제목으로 그 말을 쓴 사람이 서문에서 그 말을 쓰는 사람을 조롱한 것이다. 같은 서문에서 그는 -이즘으로 끝나는 말들을 "과도기의 말로서 딱하게" 여긴다면서, "'리얼리즘'이라는 말이 인기를 얻을수록 그것이 오래 지속될 가능성은 줄어들 것"이라고 썼다. 자기가 제목으로 삼은 말의 수명을 스스로 깎아내린 셈이다. 이유도 밝혀두었다.
"나는 유파를 좋아하지 않고, 깃발을 좋아하지 않고, 체계를 좋아하지 않고, 교리를 좋아하지 않는다. 리얼리즘이라는 작은 교회 안에 나를 가두는 것은 불가능하다 — 설령 내가 그 교회의 신이 된다 해도."
그는 그 말의 수명을 삼십 년으로 봤다. 비평가들이 새로운 세대에 대한 증오를 부추기려고 발명한 무기이지만 "그것을 쓰는 자를 상처 입히는 종류의 무기"이며, 삼십 년을 넘기지 못할 과도기의 말이라는 것이다. 그로부터 백칠십 년이 지났다.
리얼리즘의 출발점으로 늘 지목되는 사건은 1855년 파리 만국박람회 옆에서 일어났다. 살롱 심사에서 「오르낭의 매장」과 「화가의 아틀리에」가 떨어지자 쿠르베가 박람회장 근처에 자기 돈으로 가건물을 세우고 간판을 걸었는데, 문구는 이랬다.
"LE RÉALISME / G. COURBET / EXHIBITION DE 40 TABLEAUX DE SON ŒUVRE / Prix d'entrée : 1 franc"
몽테뉴 대로 7번지에 건축가 레옹 이자베가 설계한 건물로, 총비용은 1만에서 1만 2천 프랑이 들었고 개막은 1855년 6월 28일 정오였다. 출품 수는 자료마다 다른데, 간판은 40점이라고 했고 도록 표제는 회화 38점에 소묘 4점이라 적었으며 실제 번호는 1번부터 42번까지 붙었다. 여기에 박람회 공식 입선작 11점을 더해서 읽으라고 쿠르베가 도록 말미에 손으로 써 넣기까지 했다.
미술사가 이 판잣집을 선언의 장소로 기억하는 것과 달리 흥행은 실패했다. 개막 한 달이 채 안 된 7월 22일에 샹플뢰리가 쓴 편지를 보면 입장료가 벌써 50상팀으로 반값이 됐고, 그러고도 "수입은 지금까지 빈약. 조롱 기사 몇 개, 그게 전부"라고 적혀 있다. 8월 3일, 당대 최고의 화가였던 들라크루아의 일기에는 관람 기록이 남았다.
"그가 10수로 깎아 놓은 쿠르베 전시를 보러 갔다. 한 시간 가까이 거기 혼자 있었고, 그의 낙선작에서 걸작을 발견했다."
칭호는 씌워지는 것이다
그 도록에 쿠르베가 붙인 글이 「리얼리즘 선언」이라는 이름으로 전해진다. 프랑스 국립도서관 디지털 자료에 원본이 남아 있고 서명은 "G. C."인데, 정작 그 글은 리얼리즘을 주창하지 않는다. 정확히는 그 이름을 밀어낸다.
"'리얼리스트'라는 칭호는, 1830년의 사람들에게 '낭만주의자'라는 칭호를 씌운 것과 같이 내게 씌워졌다. 칭호는 어느 시대에도 사물에 대한 올바른 관념을 준 적이 없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작품들은 불필요할 것이다."
간판을 건 사람이 도록 안에서 그 간판을 남이 씌운 것이라고 썼다. 같은 해 9월 2일 『라르티스트』에 샹플뢰리가 쿠르베의 개인관을 옹호하는 글을 실었는데, 옹호문 안에도 이런 문장이 들어 있다.
"이 이름은 그 현학적인 어미 때문에 나를 질리게 한다. 나는 유파를 콜레라처럼 두려워하며, 나의 가장 큰 기쁨은 뚜렷하게 구별되는 개성들을 만나는 일이다."
이름이 붙은 지 두 해 만에 그 말은 이미 조롱거리가 돼 있었다. 1857년 살롱 평론에서 샤를 페리에가 접미사 놀이를 하면서 "퐁파두르 리얼리즘", "음란한 리얼리즘", "진창의 리얼리즘"을 늘어놓고는, 절대적 리얼리즘이란 하도 키메라 같은 것이어서 성립하지 않는다고 적었다. 같은 해 샹플뢰리는 이 말이 어디까지 번질지를 예언했다.
"무언가 새로운 지향을 가져오는 사람은 모두 리얼리스트라 불린다. 틀림없이 리얼리스트 의사, 리얼리스트 화학자, 리얼리스트 제조업자, 리얼리스트 역사가도 보게 될 것이다."
빈말이 아니었다. 그해에 바그너가 "리얼리즘에 오염되었다"는 이유로 음악지에서 공격받았으니, 회화에서 만들어진 딱지가 두 해 만에 음악으로 건너간 것이다.
이 이름을 가장 오래 뒤집어쓴 화가는 밀레다. 「이삭 줍는 여인들」과 「괭이를 든 남자」를 그린 그는 농민을 그렸다는 이유로 사회주의자로 읽혔는데, 1863년 5월 30일 전기 작가 상시에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 독법에 답했다. 육필 원본이 영국박물관에 남아 있다.
"제 비평가들은 대체 어느 클럽에서 저를 만났답니까? 사회주의자라니! 정말이지, 어느 오베르뉴 짐꾼이 고향에 편지를 쓰면서 했다는 그 말로 답해도 되겠군요 — «고향에서들 내가 생시몽주의자라고 하더라. 그건 사실이 아니다, 나는 그게 뭔지도 모른다.»"
그 딱지가 밀레에게 무엇이었는지는 상시에가 1881년 전기에 적어두었다. 그는 사회주의자도 이데올로그도 아니었으며 "그의 연민을 반란으로 바꾸고 그의 본성에 맞지 않는 교리를 그에게 씌운 것은 잘못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상시에는 그 결과를 이렇게 요약했다 — "그것이 밀레로 하여금 죽을 때까지 패배한 당파원의 쇠공을 끌게 만들었다." 밀레는 그 딱지를 죽을 때까지 끌었다.
고티에는 극찬했다
밀레를 둘러싼 통설 가운데 상당수는 1차 사료로 확인되지 않거나, 확인하면 반대다.
시인 고티에가 「씨 뿌리는 사람」을 흙손으로 긁어놓은 것 같다며 깎아내렸다는 이야기가 널리 도는데, 원문은 정반대다. 그는 이 작품을 "올해 살롱에 보내진 농민들 가운데 단연 가장 좋아하는 작품"으로 꼽으면서 "웅대함과 양식이 있다"고 썼다. 물감 두께에 대한 비판은 다른 문단에 따로 있는 것을 후대가 그 부분만 잘라 붙인 것이다.
1857년 살롱이 「이삭 줍는 여인들」을 매도했다는 이야기도 사실과 다르다. 적대적인 평은 폴 드 생빅토르 한 사람의 것뿐이고 뒤 캉과 에드몽 아부, 카스타냐리는 모두 호평했는데, 뒤 캉은 그 그림을 "좋은 검은 빵처럼 정직하고 솔직하다"고 평했다. 생빅토르가 그 그림을 "빈곤의 세 파르카이"라 부르며 사회주의로 읽었다는 것도 원문과 다르다. 원문은 저들이 마치 빈곤의 세 파르카이처럼 자세를 취한다는 것으로 포즈의 과장을 지적한 형식 비판이고, 그의 공격은 처음부터 끝까지 색채가 없고 조형이 없으며 미켈란젤로와 푸생을 흉내낸다는 미학적 지적이었다. 정치적 독법을 보고한 사람은 상시에인데 그는 그 비평가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쿠르베 쪽 사정도 비슷하다. 그가 남긴 가장 유명한 말로 인용되는 문장, 곧 천사를 그릴 수 없다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라는 말은 그의 저술에 없다. 활자로 가장 이른 출처가 1885년으로 그가 죽은 지 여덟 해 뒤인데, 비평가 폴 망츠와 화가 브라크몽이 각각 그가 늘 하던 말을 기억한다는 형식으로 적었다. 반 고흐가 1885년 7월 편지에 그 말을 인용한 것도 망츠의 기사를 읽은 뒤다.
「오르낭의 매장」이 실은 낭만주의의 매장이었다는 유명한 정식에도 1차 사료가 없다. 표준 전기를 전문 검색해도 걸리지 않고 영어권에서만 도는데, 대신 쿠르베 본인의 표현이 남아 있다. "내 「매장」, 그것은 나의 출발이자 나의 원칙 표명이었다."
설교하지 않는다는 칭찬
당대에 이 그림들을 옹호한 사람들이 든 이유를 보면 오늘 우리가 리얼리즘이라 부르는 것과 방향이 반대다. 그들은 이 그림들이 설교하지 않는다는 점을 칭찬했다.
1857년 에드몽 아부는 「이삭 줍는 여인들」에 대해, 밀레가 "눈물 짜는 빈곤의 애처로운 표정도, 시샘하는 궁핍의 위협적인 몸짓도 빌려주지 않았다"면서 "세 여인은 자비에도 증오에도 호소하지 않는다"고 썼다. 그리고 정치적 독법을 명시적으로 물리쳤다. "나는 밀레 씨가 대비를 계산했다거나 웅변적 반대명제로 사람들의 마음을 치려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십육 년 뒤 러시아에서 같은 논리가 되풀이된다. 1873년 도스토옙스키가 레핀의 「볼가강의 배 끄는 인부들」을 보고 「작가일기」에 쓴 글인데, 그는 신문에서 그림 소식을 읽자마자 겁이 났다고 했다. "그들 전부가 제복을 입고 이마에 그 익숙한 딱지를 붙인 모습으로 나타나리라 예상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실물을 보고 그 두려움이 헛것이었음을 알았다.
"배 끄는 인부들, 진짜 배 끄는 인부들,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들 중 누구도 그림에서 관객에게 「보라, 내가 얼마나 불행한지, 그리고 당신이 민중에게 얼마나 빚을 졌는지!」라고 외치지 않는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화가의 가장 큰 공적이라 할 수 있다."
앞장선 두 인부는 거의 웃고 있으며 적어도 울고 있지는 않고 자기들의 사회적 처지 따위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고 그는 덧붙였다. 그러고는 리얼리즘의 정식 자체를 논박한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그려야 한다고들 말하지만 "그런 현실은 전혀 없다"는 것이고, "이상도 현실이며, 흘러가는 현실과 똑같이 정당한 현실"이라는 것이다.
같은 캔버스를 두고 비평가 스타소프는 정반대 이유로 칭찬했다. 이 그림이 예술에서 이상적인 것에 대한 마지막 생각까지 버렸다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두 사람 모두 준거로 고골을 불러오는데, 러시아에서 리얼리즘은 회화에서 자라난 개념이 아니라 문학에서 수입된 개념이었기 때문이다.
「볼가강의 배 끄는 인부들」은 이동파 전람회 출품작으로 흔히 소개되지만 아니다. 황실 블라디미르 대공이 3천 프랑에 주문한 작품이고 아카데미 전람회에 걸렸으며 아카데미 금메달까지 받았다. 소장처도 트레티야코프가 아니라 국립러시아미술관인데, 1918년 대공의 궁전에서 이관됐다.
1934년과 1939년
같은 말이 정반대 방향으로 두 번 뒤집힌다.
1934년 제1차 소비에트작가대회에서 즈다노프가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규정하면서, 혁명적 낭만주의가 문학 창작에 구성 부분으로 들어와야 하며 "소비에트 문학은 우리의 내일을 미리 볼 수 있어야 한다"고 못박았다. 같은 연설의 다른 대목은 현실을 어떻게 그려야 하는지를 지정한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죽은 스콜라적 방식으로가 아니라, 단순히 '객관적 현실'로서가 아니라, 혁명적 발전 속의 현실로 묘사할 것."
그리고 "그렇다, 우리 소비에트 문학은 경향적이며, 우리는 그 사실을 자랑한다"고 덧붙였다. 1855년에 낭만주의에 맞서 붙은 이름이 79년 뒤에 낭만주의를 의무 조항으로 삼은 것이다.
다섯 해 뒤에는 반대편에서 판결이 내려진다. 1939년 클레멘트 그린버그가 「아방가르드와 키치」에서 "자명하게도 모든 키치는 아카데믹하며, 역으로 아카데믹한 모든 것은 키치다"라고 썼으니, 1855년에 아카데미에 맞서 붙은 이름이 84년 뒤에 아카데미와 같은 것으로 판정받은 셈이다. 그는 같은 글에서 키치가 독재자를 민중의 '영혼'과 더 가까이 접촉하게 한다고도 썼다.
그 글에는 사소한 결함이 하나 있다. 그린버그가 키치의 예로 든 레핀의 전투 장면은 존재하지 않는다. 레핀은 전투화를 그리지 않았다.
이름이 씌워지는 일은 유럽에서 끝나지 않았다. 미국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그림 한 점이 어떻게 읽혔는지를, 그 그림을 사들인 미술관 자신의 문서로 따라갈 수 있다.
1930년 10월 30일부터 12월 14일까지 시카고미술관에서 제43회 미국 회화·조각 연례전이 열렸고, 도록 207번이 그랜트 우드의 「아메리칸 고딕」이었다. 그해 12월 회보에 수상 소식이 실렸는데, 표현이 이렇다.
"주저 없이 미국적인 감정이 담긴 것은 아이오와 농부와 그의 아내를 그린 그랜트 우드의 그림으로, 「아메리칸 고딕」이라는 제목이 잘 붙었다."
노먼 웨이트 해리스 메달과 상금 300달러였다. 이듬해 2월 회보는 아예 표지 글로 이 그림을 다루면서, 그 전시에서 「아메리칸 고딕」보다 더 많은 논평을 받은 작품은 없었다고 적었다.
"모던니스트와 보수주의자가, 뉴요커와 시카고 사람이 하나같이, 뾰족한 농가 정면을 배경으로 언뜻 잡힌 아이오와 농부와 그의 아내의 이 이중 초상을 칭찬하는 데 뜻을 모았다."
매입 이유도 함께 적혔는데, 미국미술의 친구들이 이 그림을 컬렉션으로 사들인 것은 "이 작가가 여기서 철저히 토착적인 방식으로 진정한 아메리카나의 한 조각을 그려냈다고 믿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같은 미술관이 지금 이 그림에 붙여 놓은 해설은 다르다. 두 사람은 농부와 그의 딸이며 모델은 화가의 누이와 그의 치과의사인데, 우드 자신의 표현으로 두 사람은 "내 옛 가족 앨범에서 나온 양철판 사진"처럼 굳게 서 있다. 배경은 아이오와주 엘든에서 본 1880년대 목조 고딕 양식 농가다. 해설은 이어진다.
"많은 사람이 이 작품을 근대화하는 세계와 발이 맞지 않는 중서부 사람들에 대한 풍자적 논평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우드는 이것이 농촌 미국의 가치에 대한 긍정적인 상을 전달하기를, 대공황이 시작되는 시점에 안심의 전망을 제공하기를 의도했다."
아내였던 사람이 딸이 되고, 아메리카나의 진정한 한 조각이 풍자로 읽히다가 다시 긍정으로 정리된 것이다. 아흔다섯 해 사이에 같은 기관이 같은 그림을 세 번 다르게 적는 동안, 그림은 그대로 있었다.
쉰다섯 살의 크리스티나
미국에서 두 번째로 널리 복제된 그림도 사정이 비슷하다.
앤드루 웨이스의 「크리스티나의 세계」는 1948년 작품으로 뉴욕 현대미술관에 있는데, 언덕 아래로 집 세 채만 놓인 풀밭에 여자 한 사람이 몸을 눕히듯 기울여 있는 그림이다. 그 세 채가 메인주의 올슨 농장을 이루던 건물 전부다.
그 농장 집이 미국 국가사적지에 올라 있어 지정신청서에 이 그림의 사정이 적혀 있다. 웨이스는 1939년부터 1968년까지 삼십 년 가까이 이 집과 거주자들을 그렸는데, 거주자는 남매였다. 크리스티나 올슨은 1893년에 태어나 1968년에 죽었고 오빠 알바로는 1894년에 태어나 1967년에 죽었으며, 두 사람이 1929년에 이 농장을 물려받았다. 신청서는 크리스티나를 이렇게 적는다.
"어린 시절 그를 점점 부동화시켜 간 질병으로 몸을 쓰지 못하게 된 크리스티나 올슨은 수많은 웨이스 습작과 수채화와 템페라의 대상이 되었다."
여기서 병명은 나오지 않는다. 한국어로도 영어로도 이 그림 설명에는 소아마비라는 말이 흔히 따라붙지만, 지정신청서는 어린 시절에 시작되어 점점 심해진 질병이라고만 적었다. 그리고 그림이 그려진 1948년에 크리스티나 올슨은 쉰다섯이었다.
웨이스가 그린 이 집의 연작에는 「크리스티나 올슨」(1947), 「제라늄」(1960), 「무쇠 난로」(1962)가 있다. 오빠 알바로는 「기름 램프」(1945)에 한 번 그려진 뒤로 포즈를 거부했고, 그래서 웨이스는 이 어부 겸 농부의 생활을 사람 없이 사물과 건물로 그렸다. 1965년의 「웨더 사이드」를 그릴 때는 집 널판을 하나하나 세어가며 살폈다. 신청서는 어느 비평가의 표현을 인용해 크리스티나 올슨을 "현대 미국 미술에서 가장 유명한 모델"이라고 적었다.
앞 절에서는 미술관이 아내를 딸로 고쳐 적었다. 여기서는 아무도 적지 않은 병명이 설명마다 따라붙는다. 고쳐 적는 쪽이 기관에서 읽는 사람으로 바뀌었을 뿐, 그림에 없는 것이 그림의 설명이 되는 경로는 같다.
번역어가 곧 입장이었다
한국에서 이 말은 두 번 번역됐고, 번역어 자체가 입장이었다.
1990년에 나온 『민중미술을 향하여 — 현실과 발언 10년의 발자취』에서 심광현과 이영욱이 realism을 '사실주의'가 아니라 '현실주의'로 옮겼는데, 재현 기법을 가리키던 말을 현실 인식과 실천을 가리키는 말로 옮긴 것이다. 광주자유미술인협의회는 아예 '현실'을 버리고 '상황'을 택했다.
'사실주의'와 '현실주의' 사이의 거리가 이 말의 백칠십 년을 그대로 담고 있다. 앞의 것은 대상을 닮게 그리는 문제이고 뒤의 것은 무엇을 현실로 볼 것인가의 문제이니, 즈다노프와 그린버그가 갈라선 자리가 바로 여기다.
우리가 조선 후기 풍속화를 '사실적'이라 부르는 것도 그림에서 나온 규정이 아니다. 이화여대 김소연이 2019년 『한국문화연구』 37호에 발표한 「'조선후기 회화'의 연구사 — 풍속화의 재발견과 단원 김홍도」가 그 과정을 추적했는데, 논문의 요지가 이렇다.
"일제강점기 조선미술을 통사적으로 서술하기 시작했던 일본인들은 조선후기 회화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으며 … 풍속화는 조선적, 사실적, 근대적, 때로는 혁명적 장르로 재발견되며 김홍도를 대표하는 장르로 부각되었으나, 동시에 신선도는 중국식, 비합리적, 비사실적이며 상상의 산물로 이해되기 시작하면서 김홍도의 신선그림에 대한 텍스트는 점차 희미해졌음"
같은 화가의 절반이 목록에서 지워졌다는 뜻이다. 풍속화가 조선적이고 사실적인 것이 되면서 같은 사람이 그린 신선도는 중국식이고 비사실적인 것이 되어 언급에서 빠져나갔다. 홍선표도 2011년에 김홍도 풍속화와 정선 진경산수에 쏟아진 과잉 조명을, 일본 국민국가 미술사에서 이식된 '국사형 미술사'의 산물로 진단했다.
형식을 보면 반론이 두 가지 나온다. 우선 《단원 풍속도첩》은 배경이 완전히 생략돼 인물과 상황만 있고 환경이 없는데, 환경 묘사를 핵심 장치로 삼은 유럽 리얼리즘과는 정반대 전략이다. 그리고 18세기 후반의 변화를 설명할 토착 개념이 이미 있었다. 형사(形似)와 전신(傳神)이 그것이니, 서구 용어를 소급하지 않고도 같은 현상을 지시할 수 있었다는 뜻이다. 이태호의 1996년 저서가 쓴 핵심어도 '리얼리즘'이 아니라 '사실정신(寫實精神)'이었다.
도장 열세 개
교과서에 실린 그 그림들은 작가조차 확정되지 않았다.
《단원 풍속도첩》은 1970년 12월 30일 보물로 지정됐고 국립중앙박물관에 종이 25점으로 남아 있는데, 화첩에 원래 제목이 없고 작가 서명도 없다. 25폭 가운데 13폭에 '김홍도인'이라는 도장이 찍혀 있는 것이 김홍도 작이라는 근거의 전부다.
한성대 강관식이 2012년 『미술사학보』 39호에 실은 논문은 이 화첩을 19세기 초 도화서 화원들의 집단 모사본으로 본다. 근거로 든 것은 김홍도 진작에 있을 수 없는 해부학적 오류인데, 좌우 손이 뒤바뀌어 있고 팔다리가 잘못 합쳐져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화풍이 균일하지 않고 종이가 여러 종이며 판각 예정 표시가 남아 있다는 점, 〈새참〉이 김득신의 화풍이고 〈대장간〉이 김득신의 「야장단련」과 거의 흡사하다는 점이 더해진다.
반대편에는 국립중앙박물관 보존과학실의 재질·필치 분석이 있는데, 동일인 작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결론이다. 과학 분석과 양식사가 정면으로 충돌하는 구도 자체가 이 화첩의 현재 상태다.
소장 경위도 남아 있다. 1918년 11월 조선총독부박물관이 조한준에게서 75원에 사들였을 때는 27점이었고, 1957년에 「군선도」 2점을 분리해 25점으로 다시 묶었다.
신윤복 쪽은 규정의 출처가 더 뚜렷하다. 문화재청 신선영이 2019년 『미술사학연구』 301호에 실은 「일제강점기 신윤복 풍속화의 浮上과 재평가」가 그 경로를 밝혔는데, 논문 서두는 상황을 이렇게 정리한다. "신윤복에 대한 활동 당시의 구체적인 기록은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아…" 신윤복이 너무 비속한 것을 그리다가 도화서에서 쫓겨났다는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 출처가 1939년이다.
"문일평은 1939년에 펴낸 『호암전집』 제2권에서 신윤복이 '너무 비속한 것을 그리다가 도화서를 쫓겨났다'는 구전을 저서에 언급하였다."
저자 자신이 구전이라고 밝혔고 신윤복의 활동기로부터 130여 년 뒤인데, 조선시대 당대 기록은 없다. 생년 1758년도 오류이며 발생 경로까지 규명됐다. 오세창의 『근역서화징』(1928)에서 신윤복 항목이 1758년생 김석신 앞에 배치되면서 1758년 이전 출생이라는 추정이 나왔고, 김용준이 1939년 『문장』에서 그것을 영조 34년으로 단정한 것이다. 현재 학계 표기는 생몰년 미상, 19세기 초 활동이다. 당대에 가장 가까운 기록은 이구환의 『청구화사』 한 줄뿐이다. "동가식서가숙하며… 흡사 방외인과 같았고 여항인들과 교류하였다."
그의 대표작이 담긴 「혜원전신첩」은 1970년 12월 30일 국보로 지정됐고 30폭이 간송미술관에 있는데, 원래는 서울 남대문의 도미타상회라는 일본인 골동상의 물건이었고 전형필이 1935년 무렵 사들였다. 이 화첩이 어떻게 알려졌는지는 오세창이 1936년 발문에 적어두었다.
"이 화첩은 일찍이 큰 상인인 도미타씨의 손에 들어가서 여러 차례 촬영을 거치고 혹은 지극히 작게 축소되어 담배 갑에 넣어지기도 한 까닭에 사람마다 모두 얻어서 즐겁게 감상할 수 있었다."
국보가 담배갑 속 축소판으로 먼저 유명해졌다.
계보는 미술관이 만들었다
김홍도와 신윤복을 현대 한국 회화에 이어붙인 것은 화가들이 아니라 전시였다. 1990년 11월 21일부터 12월 5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제7전시실에서 열린 「단원 김홍도의 달 기념: 한국의 현대 풍속화전」이 김홍도와 현대 풍속화를 직접 연결한 최초의 사례이고, 2021년 덕수궁 전관에서 열린 「DNA: 한국미술 어제와 오늘」은 작가 97명을 모아 김홍도와 신윤복과 정선을 박수근·이중섭·오윤·임옥상과 한 전시장에 놓았다.
박수근과 이중섭을 리얼리즘 계보에 놓은 것을 1980년대 민중미술의 작업으로 보는 통설도 사실과 다르다. 김윤수가 1975년에 『한국현대회화사』에 쓴 「이중섭과 박수근」이 앞서고, 민중미술 쪽 평론가 원동석의 평론 연보 약 90편에는 두 사람을 표제로 삼은 글이 한 편도 없다.
백칠십 년 전에 파리에서 붙은 이름을 아무도 원하지 않았다. 그 이름을 책 제목으로 쓴 사람은 서문에서 그것을 조롱했고, 간판을 건 화가는 도록에서 그것이 남이 씌운 칭호라고 썼으며, 농민을 그린 화가는 죽을 때까지 그 딱지를 부인했다. 그런 뒤에 소련이 그것을 공식 양식으로 만들고, 뉴욕의 비평가가 그것을 아카데미와 같은 것으로 판정하고, 시카고의 미술관이 아내를 딸로 고쳐 적고, 서울의 미술관이 조선의 화원과 20세기 화가를 한 방에 걸었다.
그림은 그 사이에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이름을 붙이고 고쳐 붙인 것은 언제나 그림 밖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