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지의료재단 이왕준 이사장 |
(2020년 코로나 판데믹이 시작되면서 모든 저녁 미팅이 사라진 대신 하루가 멀다하고 공연장으로 피정을 갔다. 그리고 또 금년 2월 중순부터 시작된 의료대란이 장기화 국면에 접어들면서 주변의 모든 저녁 미팅이 사라지고 있다. 덕분에 나에게는 다시 공연장 피정 생활이 복귀되는 듯 하다. 5일간 매일 음악회에 다녀왔다.)
오늘은 3월 8일 금요일 저녁 7시 30분 예술의 전당에서 있었던 벨리니 오페라 <청교도> 콘체르탄테를 소개하고자 한다.
오늘 벨리니 <청교도>는 예술의 전당 오페라 극장이 아닌 콘서트홀에서 열리는 것이다. 이렇게 콘서트홀에서 간이로 무대와 의상을 장착하고 오페라 전막을 공연하는 방식을 ‘오페라 콘체르탄테’ (Concert Opera를 뜻하는 이태리 용어)라고 부른다.
이런 방식은 오페라 극장에서 공연하는 것보다 몇 가지 장점이 있다. 첫 번째는 소리와 음악에 훨씬 집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오케스트라가 반半지하의 피트에서 나와 무대 위로 올라가니 그 사운드가 당연히 더 좋고, 가수들도 무대 안 쪽에서 피트의 오케스트라 사운드를 뚫고 소리를 내는게 아니라 무대 전면에서 부르니 훨씬 부담이 덜 하다.
두 번째는 거대한 무대 세팅을 다 생략하니까 훨씬 경제적이라는 것이다. 그래도 의상을 차려 입고 동선을 잘 짜면 어느 정도는 오페라의 극적 효과를 거둘 수 있다. 그래서 무대 연출이나 드라마적인 요소보다 음악과 노래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더 큰 오페라들은 콘체르탄테 형식이 훨씬 더 큰 감동을 주기도 한다.
따라서 이런 방식으로 제일 많이 연주되는 작품들이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나 <발퀴레> 1막이고, 베를리오즈 <파우스트의 겁벌>이나 차이코프스키 <에브게니 오네긴> 같이 덜 대중적이지만 음악적 완성도가 높은 작품들도 콘체르탄테 형식을 택하곤 한다. (필자의 가장 인상적인 콘체르탄테 공연은 LA 디즈니 홀에서 관람한 존 아담스의 <Nixon in China>였다. 오늘 공연에 나온 캐슬린 킴이 모택동 부인 강청 역으로 나왔다)
빈센쵸 밸리니는 아마 이태리가 가장 혹은 두 번째로 사랑하는 음악가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유로화로 통합되기 전 이태리 자국 화폐였던 리라화에 인물로 새겨진 음악가는 벨리니가 유일했다. 1985년 이태리 화폐가 바뀔 때 베르디에서 벨리니로 교체되었다.
벨리니는 34살에 요절할 때까지 11편의 주옥같은 오페라를 남겼는데, 1801년 생인 벨리니는 그 보다 4년 먼저 태어나서 31살에 요절한 독일의 슈베르트와 너무도 닮아 있다.
벨리니는 9년 연상의 롯시니, 4년 연상의 도니제티와 더불어 19세기 초반 이태리 오페라 부흥을 이끈 3두 마차였다. 그 중 비록 작품 수는 제일 적지만 작품성이나 예술성이 가장 뛰어난 사람은 단연 벨리니이다. 그의 유려한 멜로디 라인과 극적 구성미는 바그너 조차 열렬한 팬으로 만들었고 스트라빈스키는 베토벤과 함께 벨리니를 '2B'로 칭송했다.
벨리니 오페라 중 제일 유명한 건 뭐니뭐니해도 <노르마>이지만 그 다음은 단연 <청교도>이다. 이 작품은 벨리니가 죽기 8개월 전에 마지막으로 올린 유작이다. 그만큼 그의 모든 기량과 오페라적 욕구를 다 집어 넣었다. 노래하기에 너무 어려운 오페라가 되었다. 테너 주인공은 하이 F까지 소리 내야 한다. 네순 도르마Nesun Dorma의 하이 C보다 3음이 더 높다.
그러므로 레제로 테너 중에서도 최고의 기량을 가진 밸칸토 테너가 없으면 공연이 불가하다. 뿐만 아니라 소프라노도 극강 고음의 벨칸토 소리를 내야하고 조연인 바리톤 과 베이스까지 4명의 최고 가수가 세팅되어야 한다. 이들이 없으면 공연이 불가능하다는 의미로 Puritani Quartet 즉 ‘청교도 4인조’라는 말까지 만들어졌을 정도다. 그래서 국내 공연은 물론이고 해외에서도 함부로 무대에 올리지 못한다.
이번 공연에는 한국이 나은 최고의 세계적 벨칸토 가수들이 전부 동원되었다. 재작년 차이코프스키 콩쿨 우승에 빛나는 최고의 레제로 스핀토 손지훈과 최고의 극강 콜로라투라 캐서린 킴이 주인공 역을 맡았고, 베를린 도이치 오페라극장에서 활약했던 바리톤 이동환과 비엔나 국립가극장 전속가수 출신의 베이스 박종민이 함께 ‘Puritani Quartet’을 이뤘다. 정말 최고의 가수진이고 <청교도>의 배역으로 이보다 더 완벽한 진용은 유럽 무대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당연히 오늘 공연의 품질은 이 가수들의 노래에서 끝이 났다. 우선 손지훈은 향후 세계 오페라 무대에서 후앙 디에고 플로레스의 자리를 이어받을 정도로 엄청난 실력의 소유자이다. 지난 몇년간의 콩쿨 우승 경력은 사실상 훈장 몇 개에 불과하다. 극강 고음과 레제로 콜로라투라의 테크닉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면서도 굉장한 파워와 강단을 지니고 있다.
보통 레제로는 갸날픈 음색으로 스핀토 테너가 가져야하는 역동성을 발휘하지 못하기 쉬운데, 손지훈은 역설적으로 래제로이면서 리릭 스핀토보다 더 강렬하고 옹골진 육성을 뽑아 내기 때문에 켜켜이 쌓아 올린 고음부가 탁 터져 나오면 소름이 쫙 돋는다.
이번 공연에서도 1막의 가장 유명한 아리아 ‘A te, o cara(내 사랑, 당신에게)’에서도 C#5까지 편안하게 내지른다. 이 아리아는 주인공 아르투로가 엘비라를 반기며 부르는 입장곡이다.
그리고 하이라이트는 3막의 마지막 절정을 이루는 아리아 ‘Credeasi, misera!(저 불쌍한 소녀는)’이다. F5의 고음을 무난히 터트린다. 이 오페라에 대해 사전 지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대목에 이를 때 자신도 모르게 쥔 주먹에 땀이 난다. 오늘의 손지훈! Bravissimo!!
메트 오페라의 최고 콜로라투라 출신 답게 캐서린 킴도 2막의 매드 씬Mad scene의 아리아를 훌륭히 소화했다.
여주인공이 실연의 고통으로 미쳐가는 장면을 노래하는 ‘광란의 아리아’는 도니제티의 오페라 <람메르무어의 루치아>에도 있고 벨리니의 또 다른 오페라 <몽류병의 여인>에도 나온다. 작곡 당시에 여주인공의 매드 씬은 유행이었지만 최고의 콜라라투라 소프라노가 없으면 무대가 성립하지 못한다. 그래서 방금 언급한 오페라들은 한참을 공연되지 않고 묻혀 지내다가 20세기 중반에야 마리아 칼라스 덕에 다 복원된 작품들이다.
이동환과 박종민은 바라톤과 베이스가 벨칸토적인 발성으로 얼마나 로맨틱하게 노래할 수 있는지 그 끝을 보여주는 듯 했다. 사실 벨리니 이후 베르디나 푸치니의 오페라에 나오는 바리톤이나 베이스는 주로 악역 아니면 제3의 심판자 역할이므로 실재 아름다운 노래가 많지 않다.
Bel canto가 원래 무슨 뜻이던가? 어름다운 노래라는 뜻이다. 1막이 시작하자마자 바리톤 이동환(리카르도 역)의 아리아 ‘Ah! per sempre io ti perdei(아! 당신을 영원히 잃었네)’가 애절하게 울려나온다. 시작부터 절창이다.
2막 매드씬에 앞서서 베이스 박종민(조르지아 역)이 여성합창과 화답하며 부르는 아리아 Cinta di fiori(화관을 쓰고)는 딱 벨리니 스타일의 정말 아름다운 곡조이다.
그리고 매드씬 다음에 이어지는 이중창 Il rival salvar tu dêi (자넨 자네의 연적을 살려줘야 하네)는 역사상 최고의 바리톤-베이스 커플 이중창이라 할 만하다. 마치 베르디 오페라 <돈 카를로>에서 테너와 바리톤의 이중창 ‘함께 살고 함께 죽는다 (Duetto Dio, che nell'alma infondere)’를 연상시킨다.
이번 공연의 또 다른 미덕은 반주를 맡은 서울시향과 지휘자 데이비드 리이다. 현재 서울시향 부지휘자로 있는 데이비드 리는 시종일관 열정적이면서도 정확한 비팅으로 음악을 잘 이끌었다.
오늘 공연의 주최는 세아이운형문화재단이다. 오페라 애호가이자 국립오페라단 후원회장을 오래 역임했던 고 이운형 회장이 급사한 후 그를 추념해서 10년 전에 만들어진 재단이다. 특별히 오페라 가수들을 전폭적으로 지원하고 있고, 손지훈도 지금까지 재단 후원의 덕을 톡톡히 보았다. 감사한 일이다.
이훈영 회장의 소탈하면서도 순수했던 모습이 오버랩되는 밤이다. 아마 하늘나라에서 오늘의 성
찬(聲饌)을 즐기고 계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