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왕준 명지의료재단 이사장 |
6월 22일 토요일, 요새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렵다는 임윤찬 피아노 독주회 티켓을 하루 전 기적적으로 구해 연주회장으로 향했다. 마음이 바빠서 평소보다 한참을 서둘렀지만 예술의 전당 주차장 진입에만 30분이 넘게 소요되었다. 음악회장은 이미 2시간 전부터 후끈 달아올라 있었다.
내 좌석은 뒤쪽 합창석 한가운데의 맨 앞열이다. 오랜만에 앉아보는 합창석이지만 음향만 문제없다면 피아노 관람으로는 최고의 명당자리이다. 임윤찬의 왼손을 포함 양손이 이보다 더 잘 보이기는 어렵다. 관객석이 훤히 내려다 보이는데 3층까지 빈자리가 하나도 없다.
불이 꺼지고 무대 조명이 밝아지자 임윤찬이 흰색 턱시도 차림으로 들어오고 함성과 박수가 쏟아졌다. 하지만 그는 자리에 앉자 마자 박수소리도 사라지기 전에 바로 연주를 시작했다. 피아노의 첫 소절 울림이 순식간에 공연장을 잠재운다.
1부 레파토리는 멘델스존 <무언가無言歌 Lieder ohne Worte> 2곡과 차이코프스키 <사계 Seasons> 12곡이다. 프로그램이 발표될 때 나는 왜 <사계> 12곡 앞에 <무언가> 2곡을 넣었을까 의문이었다. 하지만 공연이 진행되면서 그 의문이 플렸다.
임윤찬은 <무언가> 2곡과 <사계>의 1월, 2월까지를 연이어 쳤다. 4개의 piece가 마치 하나의 Suite 처럼 긴 호흡으로 이어갔다. 그리고 다시 3월부터 6월까지 4곡을 하나의 호흡으로, 7월부터 9월까지 3곡을, 그리고 마지막 10월부터 12월까지 3곡을 묶어서 연주했다.
이는 임윤찬이 각 piece마다 부제가 붙어 있는 차이코프스키의 12개 소품을 하나하나 단락적으로 받아들이는게 아니라, 말 그대로 사계가 변화하듯(계절이 바뀌듯) 하나의 흐름으로 이해하고 묶음으로 플어가겠다는 것을 의도한다. 마치 얼마전 출시된 쇼팽 애튜드를 슈베르트의 연가곡 처럼 하나의 큰 서사로 읽어내듯이 말이다.
그러러면 12곡으로는 이 흐름이 모자란다. 왜냐하면 1곡이 전체 서주로는 좀 약하고 2곡 ‘카니발’에서 한 호흡을 중단해야 하는데 (음악적 흐름상 이 대목에서 쉬어갈 수 밖에 없다) 결국 첫 묶음에 뭔가를 넣어야 한다. 아마 그래서 임윤찬의 편집능력(혹은 창작능력)이 발휘된게 이에 가장 잘 어울리는 멘델스존의 <무언가> 19-1과 85-4를 앞에 배치한 것이리라. 이렇게 4개의 piece가 하나로 묶이면 너무나 자연스러운 가을과 겨울 이야기가 첫 묶음으로 시작되는 것이다.
<사계> 중 가장 널리 알려져 있고 많이 연주되는 게 6월과 10월이다. 2번째 묶음이 6월로 끝나고 마지막 묶음은 10월로 시작되는 이 연주의 호흡이 너무나 참신하다. 임윤찬의 음악성과 연주 실력이야 세상이 다 아는 만큼 오늘은 그가 이 차이코프스키의 서사를 어떻게 해석하고 연주하려 했는지 그 머리쓰임새가 오히려 기특할 따름이다.
그런 의미에서 임윤찬은 이제 그냥 악보를 해석해서 재현하는 단순 연주자 이상으로 훌쩍 성장하고 있다. 클래식 음악이 작곡-연주-감상의 3단계가 하나로 실행될 때 성립 가능하다면 연주자는 작곡자의 의도를 단순 전달하는 걸 넘어서 그 해석과 재현에서 제2의 창작성을 발휘할 수 밖에 없다. 그 탁월함과 파격이 수용 가능하면서도 새로운 감동을 가져온다면 그는 이미 대가 반열에 오른 것이라 할 수 있다.
2부는 대망의 무소르그스키의 <전람회의 그림>이다. 이 곡은 4개의 프롬나드(promenade, 산책)와 10개의 부제가 붙은 소품을 엮어놓은 모음곡이다.
무소르그스키는 1837년, 그러니까 차이코프스키 보다 1년 먼저 태어나서 42살에 요절한 비운의 천재 작곡가이다. 그는 차이코프스키와 너무 대조적으로 한 번도 제도권의 음악교육을 받지 않은 딜레탕트 작곡가로서 당대에나 후대에도 가장 독창적이고 파격적이라는 평가를 받았고 프로코피에프와 쇼스타코비치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작곡가이다.(기실 제도교육 밖에 있었기 때문에 그 독창성이 가능했다)
흔히 사람들은 <전람회의 그림>이 무소르그스키가 어느 전람회장에 가서 우연히 그림을 보고 느낀 감상을 작곡한 것으로 아는데, 이는 전혀 그렇지 않다. 무소르그스키 보다 3년 연상이던 절친 사진작가 빅토르 하르트만이 동맥류로 39세 나이에 급사하자 깊은 절망에 빠진 동료들이 추모 사진전을 열게 된다. 이때 무소르그스키도 생전에 선물로 받은 2점의 사진을 내놓았고, 그 사진전이 끝나고 4달도 안 된 사이에 미친 듯 작곡된 곡이 이 <전람회의 그림>이다.
한마디로 이 곡은 절친의 죽음에 붙인 레퀴엠이자 이미 알콜중독으로 정점을 찍고 추락하기 시작한 작곡가 본인의 삶에 대한 위로의 곡이라 할 수 있다.
임윤찬은 이 곡의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고 온 몸으로 표현하려 하는듯 했다. 왜냐하면 첫 소절 프롬나드부터 그 형세가 가뿐가뿐 걷는 모양새가 아니고 비탄에 젖어 산책 중에도 못내 발걸음을 떼지 못하는 무소르그스키의 표정이 보이는 듯 했다.
사실 10개의 표제적인 사진 작품의 형상이나 스토리는 전체 연주에서 그렇게 중요한 요소가 아닐수 있다. 왜냐하면 이 10곡을 관통해서 젊은 나이에 요절한 절친 예술가의 삶을 추모하고, 나아가 생로병사를 거쳐 결국 필멸하는 모든 인간의 존재성을 묘사한다면 그게 마치 10개의 에피소드 사이를 방황하며 걸어가는 인생의 산책(프롬나드)이 아니겠는가?
사실 이 <전람회의 그림>은 1922년에 라벨이 오케스트라로 편곡한 버전이 훨씬 더 많이 연주된다. 무소르그스키 원작의 피아노 버전이 오리지널이지만 이게 잘 연주되지 않는 이유는 거의 3관 편성의 오케스트라로서도 표현이 어려운 그 음향적 효과와 40여분에 이르는 서사를 피아니스트 혼자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임윤찬이 단지 두손과 건반 만으로 원래 작곡자의 의도를 오롯이 표현하려 한 시도 자체가 대단한 도전이다. 그가 왜 이미 녹음한 쇼팽 에튜드가 아니라 <전람회의 그림>으로 첫 순회 독주회의 레파토리를 삼았는지 짐작이 되는 대목이다. (위그모어 홀 독주회는 반 클라이번 우승에 따른 답례 독주회로 간주할 수 있다.)
4번째 프롬나드를 지나서 한편 한편의 순례를 더할 때 마다 그 감정의 두께가 켜켜이 올라간다. 9곡 ‘바바야가의 오두막집’을 지나 10곡 ‘키에프의 대문’에 이르면 이제 클라이맥스이다. 임윤찬의 양손 아르페지오가 잠시 숨고르기로 들어가 멀리 종탑에서 울리는 종소리 처럼 아련한 타건들이 조용히 맴돌다가 다시 포효하기 시작한다.
이 강렬한 음렬의 행렬이 쉬지 않고 이어진다. 물결치듯 양손 아르페지오가 위 아래를 오르내리다가 밑으로 떨어져 저음부에서 탄식에 가까운 코다로 밀려 내려온다.
갑자기 명치 아래에서 뜨거운 덩어리가 목구멍으로 올라온다. 참을수 없는 울림이 목에 차오르고 이를 참으려 할수록 눈가에 눈물이 맺힌다.
마지막 코다가 다당-하고 끝이 나자 나의 목젖은 미세하게 전율하기 시작한다. 옆 사람 눈치에 눈가의 눈물을 닦아 보지만 감동의 여운이 식지 않는다.
터져나오는 함성과 포효, 기립박수. 하지만 나는 움직이기 어렵다. 오히려 이 함성이 낮설다.
임윤찬이 두 번을 무대에 들랑거리는 동안 박수와 함성이 끊이지 않는다. 심지어 어떤 여성 팬이 괴성을 지르자 장내에 웃음이 터진다. ‘사람들은 임윤찬의 연주가 좋은가, 임윤찬이 좋은가? 아님 임윤찬 연주에 와 있는 본인들이 좋은가?’
임윤찬이 첫번째 앵콜을 시작한다. 차이코프스키의 Moment Lyrique이다. 느리고 고즈넉하게 연주한다. 잠시 함성과 박수에 멈췄던 내면의 울림이 다시 시작된다. 또 목젖이 떨려온다. 아직 목구멍까지 차오른 그 덩어리가 남아 있다.
짧은 첫번째 앵콜을 마치고 나갔다 들어온 임윤찬이 인사도 없이 바로 피아노 앞에 앉는다. 두번째 앵콜이다.
리스트의 ‘사랑의 꿈(Liebestraum no.3)’. 다 다-당 다 / 다 다다 당 다 다아-
잠시 멈추었던 눈물이 다시 두 뺨에 계속 흘러 내린다. 5분도 안되는 이 곡 안에 수많은 격정과 회한과 안쓰러움이 다 녹아 있다. 흐르는 눈물에 목구멍의 덩어리가 다 녹아 내린다. 임윤찬은 정말 피아니스트를 넘어 훌륭한 가수이다.
나는 왜 내 아들 뻘의 40살 연하 스무살 청년의 연주에 눈물을 흘리는가? 내가 요사이 어떤 억압과 설움이 특별히 많이 쌓여 있었나? 연주회장을 그렇게 자주 다니지만 오늘같은 감정 일치는 드문 경험이다.
하지만 연주회의 본질이 이런 것이다. 기교적 완벽성, 탁월한 해석과 함께 혼연일체된 집중력은 연주자와 청자의 합일을 가져온다. 결국 작곡자와 연주자와 감상자의 완벽한 공명의 순간을 체감하는건 그 자체로 하나의 카타르시스이다. 이 정화淨化과정은 아리스토텔레스나 니체의 표현을 빌리지 않더라도 꼭 비극적 드라마일 필요는 없다. 오늘 같은 연주회 자체가 카타르시스를 위한 또 하나의 제의祭儀이다.
임윤찬은 3주에 가까운 7회 전국 순회일정의 최종회인 오늘 연주회에 특별히 마지막 에너지를 다 쏟아 부은듯 했다.
무소르그스키 음악이 원래 매우 디오니오스적인데 (1부 차이코프스키 음악이 상대적으로 아폴론적이라면) 오늘 밤은 그 양면을 다 경험하고 탈진해 버렸다. 그리고 그 감동과 카타르시스로 나는, 우리는 새로운 내일을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