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아트 편집부 | 지난 9월 13일 토요일, 수원 행궁동의 밤은 유난히 깊고 따스했다. 수많은 발걸음 속에 숨겨진 지하의 작은 문을 열고 들어선 복합문화공간 D.O.T. 그곳은 이미 시작될 음악적 축제를 기다리는 이들의 설레는 속삭임과 은은한 조명, 기분 좋은 술 향기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아티스트의 작은 숨소리마저 생생하게 전달되는 이 아늑한 공간에서, 우리 시대 최고의 연주자들이 빚어내는 가장 황홀한 '소리의 풍경'이 펼쳐졌다.
1부: 화려한 색채로 공간을 물들인 듀오, 미스뚜라 (Mistura)
공연의 포문은 플루트와 7현 기타 듀오 '미스뚜라'가 열었다. 마치 남미의 어느 오래된 바에 순간 이동한 듯, 그들의 첫 음이 울리는 순간 D.O.T의 공기는 이국적인 정열과 낭만으로 가득 찼다. 7현 기타가 뿜어내는 풍성하고 복합적인 리듬은 심장을 두드리는 대지의 박동 같았고, 그 위를 자유롭게 유영하는 플루트의 선율은 영혼을 간질이는 바람결 같았다.
브라질의 쇼루와 삼바, 스페인의 플라멩코 등 월드뮤직의 정수를 담아낸 그들의 연주는 단순히 악보를 재현하는 것을 넘어섰다. 눈빛만으로 서로의 호흡을 읽고, 즉흥적으로 주고받는 선율 속에서 두 연주자는 완벽하게 하나가 되어 있었다. 때로는 애수가 깃든 자작곡으로 깊은 사색을, 때로는 모두가 알 법한 스탠다드 넘버를 그들만의 색깔로 편곡해 익숙함 속의 신선함을 선사했다. 미스뚜라의 무대는 화려한 색채가 겹겹이 쌓여 완성된 한 폭의 강렬한 유화(油畫)였다.
2부: 깊은 농담(濃淡)으로 여백을 채운 듀오, 모모 (Momo)
미스뚜라가 남긴 강렬한 여운 위로, 보컬 예진 안젤라 박과 콘트라베이스 황슬기의 듀오 '모모'가 무대에 올랐다. 화려한 유화가 걸려 있던 자리에, 이제는 먹의 농담만으로 모든 것을 표현하는 한 폭의 수묵화(水墨畫)가 걸리는 순간이었다. 황슬기가 연주하는 콘트라베이스의 첫 울림은 공간의 중력을 바꾸는 듯 묵직했다. 그의 손끝에서 나온 소리는 그 자체로 서사를 품은 또 하나의 목소리였다.
그 깊고 단단한 뿌리 위로 예진 안젤라 박의 목소리가 피어났다. 때로는 한숨처럼 스며들고, 때로는 영혼의 절규처럼 터져 나오는 그녀의 목소리는 삶의 희로애락과 실존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담고 있었다. 특히 그들의 자작곡을 부를 때, 가사 한 구절 한 구절에 담긴 진심은 마치 날카로운 칼날처럼, 혹은 따스한 위로처럼 가슴에 깊이 파고들었다. 모모의 무대는 소리보다 침묵이, 채움보다 비움이 더 큰 울림을 줄 수 있음을 증명하는 시간이었다.
클라이맥스: 네 개의 점이 만나 완성한 완벽한 풍경
이날 공연의 백미는 단연 네 명의 아티스트가 함께 무대에 오른 합동 무대였다. 서로 다른 개성과 색채를 가진 두 팀이 과연 어떤 조화를 이룰지, 기대와 긴장감이 교차했다. 그러나 그것은 기우였다. 플루트는 보컬의 여백을 따스하게 감싸 안았고, 7현 기타는 콘트라베이스의 중후함에 경쾌한 생명력을 더했다. 서로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조심스럽게 자신들의 색을 섞어가는 모습은, 마치 네 명의 화가가 하나의 캔버스에 각자의 붓 터치를 더해 완벽한 풍경화를 완성해나가는 과정처럼 경이로웠다.
이처럼 완벽한 밤이 탄생할 수 있었던 비밀은 바로 '최고의 아티스트', '최적의 공간', 그리고 '최상의 기획'이라는 완벽한 삼박자에 있었다.
이 무대를 기획한 싱어송라이터 남수는 행궁동에서 '딱따구리 책방'을 운영하는 싱어송라이터이자, 지역의 문화적 토양을 가꾸는 예술가다. 그녀 자신이 무대에 올라 노래하는 뮤지션이기에, 이번 기획에는 아티스트에 대한 깊은 이해와 존중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어떤 공간에서 어떤 음악이 만났을 때 가장 큰 시너지를 내는지, 연주자가 관객과 가장 잘 호흡할 수 있는 무대는 어떤 것인지를 본능적으로 아는 기획자의 감각이 빛을 발한 것이다. 서로 다른 결을 가진 '모모'와 '미스뚜라'가 만났을 때 어떤 시너지를 낼 수 있을지 꿰뚫어 본 뮤지션의 안목이 이 공연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그 안목은 D.O.T라는 최적의 공간을 만나 비로소 완성되었다. 아티스트의 작은 숨결까지 관객에게 전달하는 친밀한 구조, 음악에 온전히 몰입하게 하는 멋진 분위기, 그리고 좋은 술 한 잔이 주는 기분 좋은 이완감까지. D.O.T는 기획자의 의도를 완벽하게 구현해낸 최고의 무대였다.
공연이 끝난 후 터져 나온 박수 소리는 쉽게 잦아들지 않았다. 네 명의 아티스트가 마지막 음을 연주했을 때, 비로소 우리는 행궁동의 깊은 밤, 음악이라는 언어로 잠시나마 완벽하게 하나가 되었음을 깨달았다. D.O.T의 문을 나서는 발걸음은 가벼웠지만, 마음은 그 어떤 때보다 풍요로운 여운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점과 점이 만나 선이 되고, 선이 모여 하나의 풍경을 만들었던 그 밤의 기억은, 앞으로 오랫동안 잊히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