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승일 감독, 내가 왜 국가보안법 위반이야?

2024.06.11 15:22:13

뉴스아트 이명신 기자 |

 

 

6월 항쟁 37주년이 되는 지난 10일, 전승일 감독이 자신의 국가보안법 위반 판결에 대하여 재심개시청구를 했다. 전 감독은 1989년 '민족해방운동사' 걸개그림을 제작했다는 이유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불법구금되어 고문과 가혹행위를 당한 끝에 1991년 4월,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 자격정지 1년을 선고받았다.

 

당시 수사관 7명이 19일 동안 다양한 방법으로 한 인간을 취조해 모든 것을 토해내게 했다... 인생의 모든 순간, 누구와 무엇을 하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낱낱이... 옆 방에서 나는 구타와 비명 소리를 들으며 (강요된) 자술서를 1000페이지 넘게 썼다... 볼펜 6개 잉크가 다 닳도록 썼다. 35년 전, 24살의 대학생이었다...  - 기자회견 중 전승일 감독의 발언 중에서.

 

서울 서초구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 대회의실에서 열린 "전승일감독 국가보안법 위반 재심개시청구 기자회견"에서 변호인단은 재심 사유로,

 

▲1989년 8월 25일 긴급구속 사유를 고지하지 않고 영장 없이 연행(불법체포), ▲사후 승인 없이 48시간 내 사후 구속 영장도 발부받지 않음(감금죄), ▲당시 국가안전기획부 소속 수사관이 '국가보안법 위반 피의사건 인지동행 보고'라는 수사보고서를 작성해 전 작가에 대한 구속영장을 발부 받음(허위공문서작성 및 행사죄) ▲구 국가보안법상 한 번만 가능한 구속기간 연장을 구 형사소송법까지 편법 동원해 3차례 연장(위법한 구속기간 연장), ▲협박 및 모욕, 감시, 잠 안재우기 등 가혹행위(수사기관의 가혹행위죄) 등을 꼽으며, 다양한 문서와 증거자료를 공개했다.    

 

 

변호인단은, "검사와 판사는 이렇게 위헌적인 구 국가보안법 규정상 절차조차도 제대로 준수하지 않은 채로 재심청구인에 대한 구속기간 연장을 주먹구구식으로 결정하고 집행했다"고 결론내렸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공익인권변론센터 재심청구변호인단 단장 이종훈 변호사는, 전승일 감독의 재심개시청구가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이날 기자회견에서 전승일 감독은 이번 재심개시청구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존엄과 권리라는 보편적 문제이자 인간 본질에 대한 문제임을 강조하며 "헌법과 국가기관이 오히려 인간을 파괴해선 안 된다"고 하였다.

 

지금도 나는 빨갱이로 취급받는다. 김영삼대통령 때 사면복권 되고 이후 (2007년) 민주화운동관련자로도 인정되었다. 나는 모순적 존재이다. (국가보안법을 위반했다는) 걸개그림은 민중미술예술작품으로 인정되었다. (빨갱이와 민주화운동가) 둘 중 하나는 잘못된 것 아닌가. 바로잡아야 한다. - 전승일 감독

 

 

전 감독은 사건이 있은 뒤 20년이 넘도록 자신의 상태를 객관으로 인지하지 못했다. 이유도 모른 채 모든 것이 힘들었고 고통 속에 자책했을 뿐이다. 가족과 커리어, 생계에조차 위협을 느끼던 2012년에야 PTSD와 공황장애 진단을 받고 치료를 시작했다. 그와 비슷한 시기에 포스트 트라우마 프로젝트를 시작하고 형제복지원 사건 등 각종 사회적 피해자 문제와도 연대했다. "상처를 궁극적으로 치료하고 삶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의 서사를 시작"한 것이다. 치유 의지를 담아 작업하는 중에는 트라우마를 잊을 수 있지만, 그의 일상은 여전히 어렵다.

 

(시간이 간다고) 트라우마의 강도는 나아지지 않는다. 나는 마음 뿐 아니라 신체도 아프다. 35년 고통에 국가가 대답해야 한다. 국가보안법은 누구나 위험해질 수 있는 강력하고 억압적인 시스템이다. 지금 우리는 그런 억압이 없어도 되는 충분히 성숙한 사회이다. 이번 재심개시청구는 트라우마의 사회적 치유 기초를 마련하고자 함이다. - 전승일 감독

 

 

변호인단은 10일 재심개시청구를 접수한다. 법원에서 검찰정으로 청구서를 보내면 검찰청의 의견을 제시하고 서면이나 대면심의가 이루어진다. 재심개시청구는 판결처리시한이 없어 기간을 내다볼 수 없지만 결정이 받아들여지면 비로소 재심을 청구할 수 있다.

 

재심이 이루어지면 전승일 작가의 민족해방운동사 그림의 이적표현물 여부가 주로 다툼의 대상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 그림은 민중미술로 재평가되어 1994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그림을 복원하여 전시하였고 일부는 <민중미술 15년> 공식 도록에도 수록되어 있다. 정치적 '성향' 차이 외에는 사실상 다툴 여지도 없는 셈이다.

 

 

국가보안법은 여전히 남아있지만, 지금은 각종 집회에서 성조기를 찢고 불태워도 '방화'가 아닌 한 잡혀가지 않는다. 이렇게 되기까지 동시대의 요구에 부응하여 온 몸으로 시대정신을 개화시켜 온 예술인들은, 국민의 기본권을 하찮게 여겼던 권위주의 시대 국가기관과 그 소속 공무원들에게 끝까지 책임을 물을 것이다.  

 

전승일 작가는 아래의 시를 통해 온 나라와 삶을 모순덩어리로 만들어버린 국가보안법에 대하여 하고자 하는 말을 갈음했다. 

 

대한민국 알고리즘 (재심청구인 전승일 감독의 소회)

 

나는 인간으로 태어났다.

(중략)

아름다움은 인간과 공존하는 것이고

인간을 확장하는 것이다.

그것이 예술가가 기꺼이 하는 일이다.

그런데

너는 아름다움에 대한 인간의 탐구를 억압했다.

너는 생명에 대한 인간의 사랑을 억압했다.

너는 인간의 생각마저도 차단하고 짓눌렀다.

(중략)

너는 나의 몸과 영혼을 파괴했다.

나는 파괴되어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중략)

너는 태생부터 너무 폭력적이었다.

인간의 생각과 얌심과 사상과 예술을 압살하고 있는 너

이 나라 모든 고통과 악의 근원

이 나라 모든 억압의 철옹성

 

나는 인간의 이름으로 이제 너를 해체한다.

(중략)

너를 영원히 가두겠다.

너의 이름 국가보안법!

이명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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