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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실배나무 노거수의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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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한 야생종자 가치를 알고 잘 보존해야

나무칼럼니스트 이동고 |

 

8년 전 연변조선족자치주를 여행한 적이 있다. 차를 달려도 달려도 끝이 보이지 않는 광활한 과수원 지역이 펼쳐지는 광경을 보고는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무엇을 키우는지 궁금했는데 안내자가 사과배 과수원이라고 했다. 마침 배꽃이 피는 5월이라 차를 잠시 멈춰 달라고 부탁하고는 사진을 찍었다. 이 사과배는 대략 120여 년 전에 탄생했는데 사과배는 조선족 농경 문화의 축소판이자 조선족이 중국 땅에 자리매김했음을 보여주는 상징물이라 할 수 있다.

 

 

연변을 대표하는 과일인 사과배 탄생비화는 이러하다. 1897년 함경북도 경성군 주남면 용정동에서 살던 가난한 선비 최병일 선생은, 일제의 탄압과 시달림 속에서 조선의 운명이 다해감을 감지하고는 식솔을 거느리고 중국 용정 노두구진 소기촌을 이주했다. 당시 아들 최창호는 막 스물을 넘긴 나이였는데 할아버지가 러시아에서 벌어온 돈으로 총 10여 ㏊의 땅을 사들였다. 논농사와 밭농사 외에 과수원을 꾸리고 양봉업을 벌였다. 산등성이 비탈에 살구, 오얏, 배, 복숭아, 찔광이(산사 열매)와 돌배나무를 줄지어 심었다.

 

1921년, 원예지식도 풍부했던 최창호는 조선의 고향으로 다녀오는 동생 최두범에게 부탁해 배나무 가지를 가져오게 하였다. 최창호네 집 앞 터전에는 2~3년 자란 수십 그루 돌배나무가 있었는데 동생이 북청에서 가져온 배나무 가지를 돌배나무에 접지했다. 그해 가을에 달린 배가 어찌도 큰지 어른들 주먹만 하고 맛도 좋았다. 새하얗고 부드러운 살이 많고 핵이 작았으며 당분과 수분이 많았다. 모대는 돌배나무이지만, 과일은 돌배에 비할 바 없이 참 좋다는 뜻에서 ‘참배’라고 불렀다. 1952년에 와서 길림성 과일 품종 조사조가 그 배의 외모가 사과와 흡사하다는데서 ‘사과배’라는 새 품종이름을 지었다.

 

 

우리나라 야산에 야생 배나무류는 흔치 않다. 그렇다고 아주 귀한 것도 아니다.다만 야생 배나무는 음수 성질이 강한 편이라 다양한 숲 속 교목과 관목에 섞여 자라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 야생 배나무 종류가 얼마나 되는지는 학자에 따라 이견이 많은데 대략 5종, 9 변종으로 정리하고 있다.

우리나라 산돌배는 털산돌배, 금강산돌배, 청실배, 남해배, 문배, 취앙네 등 6변종이 알려져 있다. 고동옥씨라는 분은 33년째 재래종 배나무 수집과 보존을 하고 있는데 지금까지 수집한 100여종이 외형과 맛이 다르다고 하니 우리나라가 야생배나무의 고향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다. 우리나라 강원도 인제군에서는 무심이배를 비롯해 참배, 돌배, 산돌배, 깨깨우리 등의 재래 배들이 아직 재배돼 내려오고 있다고 한다.

 

배나무는 재목으로는 치밀, 견고, 균질하여 기구나 인판, 빗, 다식판, 전각 등의 용재로 쓰인다. 8만대장경 경판 재질은 64% 이상이 산벚나무이고, 14%가 돌배나무, 그 나머지는 후박나무와 단풍나무이라고 밝혀졌다. 꽃과 열매가 관상수로도 좋고 때로는 민속약과 술의 재료가 되기도 한다. 산돌배 변종의 하나인 ‘문배’가 유명한데, 꽃향기가 아주 좋아 관상수로도 개발되기도 하였다. 평안도에서 전승되어 오는 유명한 문배주에는 사실 ‘문배’가 들어가지는 않는다. 조와 수수로 문배나무 꽃과 과실 향을 내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울산에도 배내골이라는 지역이 있다. 인근 영남알프스 근처에 돌배나무가 많아서 붙여졌다는 설도 있지만 ‘배내소를 키워 어렵게 살던 마을’에서 왔다고 볼 수 있다. 아무튼 배내골에서 돌배로 빚은 술은 맛과 향이 아주 좋았다.

 

 

청실배나무(Pyrus ussuriensis var. ovoidea Rehder)는 산돌배나무의 변종으로 한국특산종이다. 청실리(靑實梨)라고도 불린다. 진안 은수사 청실배나무(천연기념물, 1997년 지정)와 정읍 두월리 청실배나무(천연기념물, 2008년 지정)가 유명하다. 울산지역 울주군 온양읍 내광마을에 더 큰 청실배나무가 자라고 있다. 2013년 울산생명의숲이 찾아낸 성과이다. 둘레는 은수사 청실배나무(천연기념물 386호, 추정 수령 600살)에 견줘도 더 큰 것으로 조사됐다.

 

며칠 전 물어물어 내광마을 청실배나무를 찾았는데, 마침 배가 주렁주렁 달렸다. 익지는 않았지만 근처 낙과를 한 입 베어 먹으니 벌써 단맛이 들었다. 청실배는 맛이 달고 연하며 시원한 느낌이 있어 구한말까지 왕실에 진상되던 재래종 명품배로 유명했다. 이 청실배는 일본 품종인 ‘장십랑’과 교배시켜 근대 최초의 재배 품종인 ‘단배’를 만들어낸 이력이 있다.

 

 

한방에서는 청실배나무 열매를 산리(山梨)라 하여 독성 물질과 화농성 골수염 제거에 짓찧어 붙이거나 어혈 제거에 사용한다. 과실에는 사과산, 구연산, 과당, 포도당, 자당 등이 풍부하게 함유되어 있다. 민간에서는 뿌리를 탈장치료에, 줄기를 곽란과 토혈 등에 사용하였다.

 

 

예로부터 울산배는 특산품으로 유명했다. 배를 재배하기에 적합한 점질, 사질 토양을 가지고 있으며, 배의 생육기에는 기온이 높다. 또 울주군 서생지역은 배 농사에 알맞은 천혜의 기후조건을 다 갖춘 축복 받은 지역이다. 일단 기후조건이 좋은데 알맞은 일조량, 강우량, 해안성 기후라는 조건에 야산을 개간한 곳에서 키운다. 토질은 물빠짐이 좋고 낮과 밤의 기온 차가 심하고 바다의 짠 물기가 바람을 타고 자연적으로 뿌려져서 전국의 다른 지역에 비해 당도가 아주 높다.

 

공단이 만들어지기 전까지만 해도 배꽃 피는 시기나 배 수확하는 시기에는 청춘남녀들이 즐겨 찾는 데이트 명소였다. 농촌진흥청이 13일 최신 기후변화 시나리오를 반영한 주요 과일 재배지 변화를 관측한 결과를 보면 지구 온난화로 20여년 후에는 울산의 특산품인 ‘울산배’ 재배지가 급격히 감소하고, 30여 년 뒤에는 울산에서 그 명맥을 찾기 힘들 것이란 관측이다.

 

지역공공기관은 지역에 있는 귀한 유전자를 보존하는 데 앞장서야 한다. 야생 배나무가 자원으로 중요한 이유는 앞에서 봤듯이 한랭이나 건조에 강하고, 바람직한 육종이나 품질개량의 재료 또는 재배품종의 접목을 위한 대목으로 아주 유용한 자원이기 때문이다.

 

 

배로 유명한 울산지역에 돌배나무 가로수길이나 울산수목원에 청실배나무 꽃동산 같은 것이 만들어지면 좋겠다. 태화강 국가정원에 우리나라 토종 야생배나무 정원은 어떨까? ‘이화(梨花)에 월백(月白)하고 은한이 삼경인제 ....’ 이조년 시조에 나오는 배꽃은 어떤 배나무였을까 문득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