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미술의 판화가 오윤(吳潤, 1946~1986)의 작고 40주기를 맞아 그가 새긴 판화 전작 187종을 한자리에 모은 전시가 열린다. 〈오윤 40주기 특별 판화전 — 새김에서 각인으로: 1946—1986, 오윤의 궤적〉은 9월 23일(수)부터 10월 12일(월)까지 서울 종로구 동덕아트갤러리에서 열린다. 생전에 찍은 판화와 유족이 원판으로 찍은 사후 판화를 아울러 오윤의 판화 전부가 한 전시장에 걸리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며, 주최 측은 이런 전작전이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밝혔다. 오윤의 이름은 익숙하지만 그의 판화를 실물로 본 사람은 많지 않다. 사십 년 사이 오윤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이 되었고 경매에서 값이 올랐다. 도판과 화면으로도 널리 퍼졌다. 그러나 목판화는 인쇄물로 옮겨지는 순간 가장 중요한 것을 잃는다. 칼이 지나간 깊이, 종이에 눌린 자국, 먹이 번진 결이다. 이번 전시는 그 잃어버린 것을 되돌려 놓는 자리다. 판화를 고른 이유 — "더 많이 찍고 더 많이 나누려고" 1946년 부산 동래에서 태어난 오윤은 소설 『갯마을』을 쓴 오영수의 아들이자, 동래 학춤을 이어온 집안의 외손이었다. 서울대 미술대학 조소과에 들어갔지만 첫 걸음
태워진 칠십칠 미터 1989년에 그림 한 점이 불탔다. 길이 77미터, 갑오농민전쟁부터 5·18까지를 담은 걸개그림이었고, 제목은 「민족해방운동사」였다. 전국 다섯 개 예술단체와 서른 개 대학 예술패 회원들이 석 달에 걸쳐 함께 그렸다. 이 그림이 어떻게 없어졌는지는 여러 매체가 같은 문장으로 전하는데, 출정식에서 경찰과 백골단에 압수돼 소각됐다는 것이다. 정확히 언제 어디에서 태워졌는지를 적은 1차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남은 것은 슬라이드뿐이었다. 미술사학자 최열이 서울대 아크로폴리스 전시 때 찍어둔 필름이 보존돼 있었고, 서른일곱 해 뒤인 2026년 5월 그 필름을 바탕으로 이 그림이 다시 나타났다. 광주시가 개관한 미디어아트 전시공간에서 디지털과 인공지능 기술로 재창작한 영상 작품으로였다. 복원에는 석 달이 걸렸다. 77미터짜리 천 그림이 사라지고, 그것을 찍은 슬라이드가 남고, 그 슬라이드에서 영상이 만들어졌다. 걸개그림이 겪는 일이 대체로 이런 식이다. 이 그림 때문에 사람이 감옥에 갔고, 그 사건의 대법원 판결이 남아 있다. 1990년 9월 25일 선고된 90도1586 국가보안법위반 사건이다. 판결문은 여러 쟁점을 다루는데, 그중 하나가 걸개그
그림을 감정한 사람 1998년 3월 13일, 대법원 제3부는 유화 한 점을 이렇게 읽었다. 그림 상반부는 북한이며, 나무숲 오른쪽 아래에 그려진 산은 북한에서 '혁명의 성산'으로 일컬어지는 백두산이고, 꽃이 만발한 곳의 초가집은 김일성 생가를 암시한다. 그 아래에서 농민들이 오곡과 풍년을 경축하며 춤을 추는 장면은 결과적으로 북한을 찬양하는 내용이다. 그림 하반부는 남한이고, 농부가 황소로 써래질을 하며 이티(E.T)와 람보와 양담배와 코카콜라와 레이건과 나카소네와 전두환을 남해 바다로 쓸어버린다. 이 장면은 피지배계급이 지배계급을 타도하는 민중민주주의 혁명을 일으켜 연방제 통일을 실현한다는 북한 공산집단의 주장과 궤를 같이한다. 결론은 한 문장이었다. 이 그림은 "반국가단체인 북한 공산집단의 활동에 동조하는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표현물"이다. 이 판독이 어디서 왔는지, 지금은 알 수 있다. 유엔 자유권규약위원회가 2004년에 채택한 결정문에 반대신문 결과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반대신문에서 드러난 바에 따르면, 그 감정인은 전직 북한 공작원이자 전직 그림 교사였으며 미술에 관한 그 이상의 전문적 식견은 없었다. 그는 경찰청 대공전술연구소에 고용되어 있었고,
1934년 2월 10일 토요일, 밤이 깊은 뒤에 뉴욕 록펠러센터로 트럭 한 대가 들어왔고, 인부들이 비계를 세우고 RCA 빌딩 로비의 벽을 올랐다. 손에는 도끼가 들려 있었다. 벽에는 가로 11미터 45센티미터, 세로 4미터 85센티미터짜리 벽화가 있었고, 그들은 그것을 부수어 벽에서 떼어냈다. 그 벽화는 이미 아무도 볼 수 없었고, 아홉 달 전에 천으로 덮여 가려진 상태였다. 계약금 2만 1천 달러는 전액 지급된 뒤였고, 화가는 진작 해고됐으며, 작업은 미완성으로 멈춰 있었다. 돈은 돌려받지 못했고, 그림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굳이 부수었다. 왜 그랬을까. 예술이 정책을 바꾼 가장 극적인 사례, 더스트볼을 아시나요 지난 글에서 나는 1930년대 미국의 더스트볼을 다루면서 도로시아 랭의 사진과 존 스타인벡의 소설과 우디 거스리의 노래가 정치의 비용 계산을 바꾸어 놓았다고 썼다. 그 뒤로 비슷한 사례를 더 찾아보았는데, 자료를 파고들수록 눈에 들어온 것은 달랐다. 예술이 법을 바꾸었다는 인과를 문서로 증명할 수 있는 경우는 생각보다 드물었지만, 권력이 예술에 되받아친 기록은 지나칠 만큼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형량이 있고, 압수 목록이 있고, 서한이 있고
판화가 오윤(1946~1986)의 40주기인 올해, 철거 위기에 놓인 그의 초기작을 지키기 위한 전시가 열리고 있다. 《오윤 테라코타 보존 기금마련전》이 지난 26일 서울 인사동 관훈갤러리에서 개막해 8월 9일까지 이어진다. 오프닝 행사는 29일 오후 4시 관훈갤러리 3층에서 열린다. 전시가 지키려는 작품은 서울 광진구 구의동 옛 상업은행(현 우리은행) 지점 건물 내벽의 테라코타 부조다. 1973년, 당시 스물일곱이던 오윤이 동료 오경환·윤광주와 함께 만들었다. 군에서 얻은 병으로 제대한 뒤 경주의 전돌 공장에서 흙을 만지던 청년이, 새로 짓는 은행 건물의 안쪽 벽을 맡아 달라는 의뢰를 받아 완성한 작업이다. '칼노래' 같은 목판화로 이름이 알려지기 한참 전, 오윤이 남긴 가장 이른 자국 가운데 하나다. 그 벽이 올봄 건물 매각으로 사라질 처지가 됐다. 늦어도 8월 초까지 부조를 떼어 옮기지 못하면, 반세기를 버틴 작품은 건물과 함께 부서진다. 소식이 알려지자 보존을 요구하는 서명에 시민 1만 1천여 명이 이름을 올렸고, 이 가운데 5천여 명은 추진위원으로 한 걸음 더 들어왔다. 오윤의 차남 오상엽 씨는 "이 벽화는 이제 저희 가족의 것이 아니라 시민 모두의
서울 광진구 구의동의 낡은 은행 건물 안쪽 벽. 반세기 가까이 가벽 뒤에 숨어 있던 테라코타 부조 두 점이 철거를 눈앞에 두고 있다. 건물은 올봄 새 주인을 맞았고, 철거는 이르면 2~3개월 안에 시작된다. 행정에 보존을 청원하는 목소리는 이미 1만 명을 넘어섰지만, 행정의 시간은 철거의 시간을 따라가지 못한다. 그래서 시민들이 먼저 지갑을 열기로 했다. 흙을 빚던 노동자 청년들 1973년, 상업은행(현 우리은행) 구의동 지점 객장 양쪽 벽에 마주 보는 부조 두 점이 들어섰다. 한쪽 벽에는 사람의 형상이, 맞은편 벽에는 새의 등을 표현한 추상 문양이 새겨졌다. 흙을 구워 빚은 이 작업을 한 이는 오윤·오경환·윤광주, 세 청년이었다. 오윤은 이 작업에 앞서 1971년 삼각지 지점 부조에 참여했고, 곧이어 입대했다. 위장병이 악화돼 이듬해 조기 제대한 그는 동료들이 이어가던 부조 작업에 다시 합류해 구의동 지점을 함께 완성했다. 이들은 부조를 굽기 위해 경주와 일산에 전돌 공장을 직접 운영하며 흙과 씨름했고, 신라 고분과 와당의 고졸한 미감을 손끝으로 익혔다. 이듬해에는 동대문 지점 부조로 작업이 이어졌다. 노동자였던 청년들이, 노동자들이 매일 드나드는 은행 객
1986년 7월, 마흔의 나이로 떠난 민중미술의 거장 오윤. 그가 청년 시절에 새긴 한 벽이, 50년 만에 사라질 위기에 놓였다. 서울 광진구 구의동의 옛 상업은행(현 우리은행) 지점 외벽에 양면으로 새겨진 테라코타 부조. 올해 봄 그 건물이 매매되었고, 늦어도 2026년 8월 초까지 안전하게 해체·이전하지 않으면 작품은 멸실된다. 이에 한국스마트협동조합(예술인협동조합)은 4월 28일, 「오윤 구의동 벽화 시민 청원」을 시작했다. 차기 서울특별시장께 작품의 안전한 해체·보존·이관을 책임져 달라고 청하는, 시민의 이름으로 드리는 청원이다. 마감은 2026년 5월 10일, 목표는 1만 명의 이름이다. 청원의 무게를 가늠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벽을 새긴 사람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그가 어떤 길을 걸어 그 벽 앞에 서게 되었는지, 그 벽 너머에서 어떤 손길로 한국 민중미술의 가장 묵직한 한 줄을 새겨갔는지. 부산의 골목에서 자란 아이1946년 4월 13일, 부산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다. 소설 『갯마을』, 『메아리』로 한국 문학사에 이름을 남긴 소설가 오영수의 장남, 오윤이었다. 문학적 토양이 비옥한 가정에서 자란 그였지만, 그가 진정으로 매료된 것은 책 속의
전시가 끝났는데 전시는 끝나지 않았다. 씨앗페 2026(Seed Art Festival)이 서울 인사아트센터 3층 G&J갤러리에서 막을 내린 것은 지난 1월 26일. 관람객의 발길이 끊긴 인사동 한복판의 갤러리 공간은 이미 다른 전시로 채워졌지만, 씨앗페가 시작한 이야기는 그 벽 너머에서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폐막 석 달이 지난 4월 중순, 이 전시는 온라인 갤러리 saf2026.com에서 '종료 시점을 정해두지 않은 상시 전시'로 형태를 바꿔 계속 흐르는 중이다. 그리고 작품 한 점이 팔릴 때마다, 제1금융권에서 거절당한 다른 예술인의 앞에 저금리 대출 창구가 한 번씩 열린다. 왜 '종료 없는 전시'라는 말이 가능한가일반적인 아트페어는 부스가 해체되는 순간 판매도 끝난다. 작품은 작가의 창고로 돌아가고, 수수료 정산이 끝나면 기획자와 관람객의 관계도 함께 닫힌다. 전시란 본래 시간의 예술이기에 당연한 수순이다. 씨앗페 2026은 그 수순을 따르지 않았다. 이 전시는 한국스마트협동조합이 2014년부터 운영해온 '예술인 상호부조 금융' 시스템에 재원을 공급하는 통로로 설계됐기 때문이다. 조합 입장에서 오프라인 13일간의 관람 열기는 시작일 뿐, 기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