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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게 피어 더 아름다운, 연극인 권남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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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아트 이명신 기자 |

 

무엇이 그녀를 붙잡았던 걸까? 지금도 알 수가 없다. 교직을 떠나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그리고 비엔나에서, 거의 20년을 돌아 비로소 매진할 수 있었다. ‘연극’이라는 것에.

 

 

연극애호가였을 뿐인데, 무대에 설 것도 아니면서 <부산대 사범대극회>를 창립하였다. 졸업 후 교사 시절에는 사대극회 출신이 주축이 된 극단을 만들었고 전용 극장까지 있는 극단으로 성장하는 데 한몫했다.

 

처음에는 연기 이외의 일만 했다. 공적인 이유가 아니면 나서는 성격이 아니기에 연기는 생각도 안 했다. 그러다 결국 배우가 되면서 삶의 균형이 깨졌다. 살아가면서 해야 하는 여러 가지 역할들 속에서 연기 쪽으로 추가 기운 것이다. 갈등이 왜 없었겠는가.

 

배우로 처음 무대에 선 <한씨연대기> 공연 중 교복을 입고 한 씨의 딸로서 마지막 독백을 할 때였다. “오늘 아침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전보를 받았습니다.” 그 말이 가슴 깊은 곳에 박히면서 눈물이 떨어졌다. 극 중 아버지가 아닌 권남희가 그 대사와 함께 죽었다.

 

배우가 아닌 권남희를 죽이고, 배우 권남희로 다시 살기로 했다. 하지만 연기를 전공하지도 않고, 나이도 경력도 애매하여 특정 극단에 소속되기도 힘든 권남희가 연극계에서 버티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영화 단역 출연 제의를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첫 출연 영화의 감독이 권남희에게 “배우가 되려면 눈에 그늘을 없애야 한다”고 했다. 천의 얼굴을 가져야 하는 배우의 눈에 그늘이라니! 감독의 그 말이 화두가 되었다.

 

눈의 그늘은 긴장에서 비롯됐다. 사람을 만날 때는 물론, 연기할 때조차 긴장을 풀지 못해서 몰입하지 못했다. 그런데 슈테판 성당이 있는 비엔나 중심가에서 생애 처음으로 자유를 느꼈다. 권남희는 스스로 해방되기 위해 비엔나로 떠났다.

 

 

연기학과에 등록해 비자 문제를 해결하고, 룸메이트와 라이브뮤직바를 운영하면서 일단의 생계를 해결하였다. 그리고 한인 연극인 한 분과 대사관에서 우리말로 하는 연극을 무대에 올렸는데 반응이 좋았다. 슈베르트의 “겨울나그네”를, 독일 가곡을 전공한 바리톤 가수가 노래를 하고 권남희는 우리말 대사로 연기하는 연주회를 필라델피아와 비엔나에서 갖기도 하였다.

 

이후 한국을 방문해 공연에 참가했고, 2009년에는 한국 배우를 초청하여 직접 제작한 ‘사라치’라는 연극을 비엔나와 브라티슬라바 무대에 올리기도 했다. 이를 위해 삼성, 기아, 공공기관을 찾아다니며 후원을 받았다. 그런데 문제는 엉뚱한 곳에서 생겼다. “사라치는 일본 말로 빈터라는 뜻이에요. 중년부부를 통해 존재의 의미를 살펴보는 내용이죠. 그런데 한인회에서 일본작가 작품을 왜 올리느냐 하면서 갈등의 씨앗이 생기게 되었어요.”

 

10년 공든탑이 한일감정으로 무너졌다. 절실히 연기를 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권남희는 한국으로 돌아와 바닥부터 다시 출발해야 했다. 희미해진 인연을 찾아다니고, 오디션 플랫폼에 포트폴리오를 올렸다. 불안과 좌절이 너무 익숙해 오히려 괜찮을 무렵, OCN 제작 드라마 <텐> 중 한 편에 주인공으로 발탁되었다. 이를 계기로 대학로 연극계 중심으로의 인연도 연결되고, 극단에도 들어가면서 비로소 연극계에 ‘소속’이 생겼다.

 

그렇다고 편안해진 건 아니다. 검정고시 출신 대통령을 끝까지 인정하지 않은 사람이 있듯이 학벌도 연고도 없는 권남희에게 연극계는 영원한 짝사랑과 같았다. 권남희는 높디높은 성벽의 담벼락을 돌고 돌아 작은 문 하나 찾아냈을 뿐이다.

 

 

요즘은 ‘지속 가능한 공연을 위한 공연예술인 협동조합(지공연)’과 많은 시간을 함께 한다. 지공연은 대학로에서 20년 이상 활발히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중견 연극인들이 모여 결성했다. 협동조합의 의미를 실천하면서 서로 도와 무대를 열어간다. 그래서인지 호응이 좋다. 최근에 무대에 올린 <니 부모 얼굴이 보고 싶다>는 연일 매진이었다. 권남희는 2021년 7월말부터 지공연의 대표를 맡고 있다.

 

삶이 윤택해진 것은 아니다. 연일 매진이었지만 배우 개런티를 제외한 제작비를 조금 상회하는 수준이다. 애써 진행한 텀블벅 펀딩과 모두 마음 모아 진행해 준 티켓 판매 등으로 배우 개런티를 조금씩 나누어 가지게 되었지만 그 금액이 너무 미미하여 밝히기 어려울 정도다. 최저임금에는 당연히 못 미친다.

 

“2014년에는 작품 욕심에 6편에 참여했어요. 일 년 내내 연습과 공연으로 쉬는 날이 없었죠. 그해 연극에서 번 수입이 650만 원이었어요. 비교적 큰 액수는 성남아트센타 공연으로 받은 거고요. 일반적인 공연 개런티가 얼마나 적은지 알 수 있죠.”

 

수입은 없지만 높은 테크닉이 요구되는 이 연극이라는 놈과 친해지기 위해 오늘도 호흡, 발성, 몸짓을 연구하고 연습한다. 호흡으로 해라, 남의 대사를 들어라, 연기는 리액션이다, 하는 말들을 지금만큼 진심으로 이해하고 스스로의 기본기가 부족하다고 느낀 적이 없었다.

 

 

권남희는 “오랫동안 저를 지켜본 선배님께서 이번 공연을 보고, 이제 비로소 네가 아니라 역할이 보이더라고 하셨어요... 이거 칭찬이겠지요?”라며 수줍게 웃었다. 매미는 무조건 7년 동안 땅속에 묻혀 있어야 한다. 재능도 의지도 중요하지 않다. 그냥 그렇게 되어 있다. 그렇게 세월이 가야만 하는 것들이 있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서둘러 지공연 합평회를 향해 떠나는 권남희는, 늦게 피어 더 아름다운 꽃이란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