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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초보에서 오페라 주역까지, 성악가 이재성 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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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아트 이명신 기자 |

 

성악가 이재성은 적어도 아내보다는 노래를 못했다. 노래방에 가면 박자 맞추고 추임새 넣는 역할이었다. 그랬던 사람이, 나이 47살에 성악을 시작하여 오페라 무대에 서더니 아예 아마추어 오페라단을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문자 그대로 가산을 탕진해가며 23명의 스승에게 사사 받았고, 나름대로 터득한 ‘아마추어에 특화된‘ 발성법을 무료로 알려준다. 그러더니 예술인들이 기아선 상에 허덕이던 코로나 기간에 ‘영끌’하여 아예 아트홀을 하나 만들었다.

 

 

무엇이 그를 여기까지 이끌었을까?

 

그의 첫 번째 직업은 은행원. 적성에 맞지 않았지만 홀로 자녀를 키우신 아버지의 뜻에 따라 무려 21년이나 착실하게 직장 생활을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바로 퇴사하고 군포에 국내 최대 규모의 어린이 실내놀이터를 냈다. 300평 규모의 놀이터를 ‘품질관리’ 때문에 부부가 함께 청소했는데, 2년 만에 아내의 연골이 나갔다. 그래서 다시 시작한 일이 나이키 수입 의류 사업. 중국을 상대했었는데, 된통 사기당하고 “쫄딱” 망했다.

 

“어느 정도로 망했냐 하면 보증금도 없어서 4식구가 지인의 원룸 오피스텔에 들어갔어요.”

 

극한 상황에 처하니 창의력이 고도로 발휘되었다. 당시 아현동 지역은 재개발이 한창이었는데, 이주비 대출을 100% 해주지 않아서 주민들이 애를 먹었다. 은행원 시절 경험을 되살려 이주비 차액을 대출해 줬을 때 예상 손실률을 계산해보았다. 아주 안전한 상품이 될 것 같았다. 이 사업계획을 들고가 삼호저축은행의 투자를 받았다.

 

재개발조합사무실 바로 앞에 있는 관리사무소를 설득해 내보내고 그 자리에 영업소를 차렸다. 드나드는 주민들에게 대출 상품을 권했는데 예상대로 대박이 났다. 그 덕에 내집마련은 물론, 부동산계의 큰손이 될 즈음에 저축은행 사태가 일어났다. 저축은행 대주주와 일부 직원, 금융감독원, 회계법인의 방만함으로 자기자본까지 잠식된 부실저축은행이 생겨나고 이로 인해 다수의 저축은행이 퇴출된 사건이다. 삼호저축은행이 망하고 또다시 삶의 터전이 없어졌다.

 

배운 것이 도둑질이라, 여기저기서 투자를 받아 기존의 영업력으로 하던 일을 계속했지만, 날이 갈수록 스트레스만 심해졌다. 은행을 통하지 않고 채무자들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다 보니 회의감이 극심했다. 유일한 낙은 골프였다.

 

2012년, 우연히 골프장에서 만난 성악과 교수가 골프 알려준 품앗이로 굳이 성악을 가르쳐주겠다고 했다. 못 이기는 척 몇 번 하다가 관둘 생각이었는데, 그만 푹 빠져버렸다. 음악에 빠져버린 사장을 버리고 직원이 하나둘 그만두면서, 자연스럽게 사업도 접게 되었다. 생계와 음악 사이에서 음악을 선택한 대책 없는 남자, 아내와 가족은 어땠을까?

 

 

준프로급이던 골프마저 때려치우고 블라디보스톡 국립음악원으로 유학 가겠다고 했을 때 아내는 “이혼하고 가라”고 했다. 하지만 노래 시작하고부터는 일체 화도 안 내고 언어 구사 방식이나 운전습관도 달라진 남편을 보아온 아내이다. 결국, 남편을 격려하면서 스스로 직장을 구해 가장 노릇을 자처했다.

 

“아내는 제가 그 일 계속했으면 죽거나 아프거나 병신 되거나 정신병원에 갔을 거라고, 다행이라고 해요. 그땐 제 눈빛이 완전히 달랐대요. 지금은 사람 됐다고... 삶이 달라졌어요.”

 

가장 속상할 때는 돈이 없어서 레슨을 못 받거나, 보고싶은 공연을 못 볼 때였다. 선생님이 그의 상황을 이해하고 레슨비를 줄여주면, 다른 제자를 소개하여 반드시 보답했다. 왕초보 시절에 하던 “아마추어성악동호회”가 점점 커져서 가능했던 일이다. 없어질 뻔한 동호회를, 사무실에 피아노를 들여놓고 직접 방음벽을 만들어 무료 레슨까지 해가며 유지했더니 지금 회원 수가 8천 명이 넘는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배운 발성법을 무료로 알려주고 있다. 열심히 할 의지만 있다면.

 

 

이재성 단장의 최대 동력은 두려움 없는 추진력이다. 처음 성악을 배울 때도 그랬다. 노래를 못하던 시절에도 잘할 수 있을 거라고 굳게 믿었고, 노래를 배우기 시작하고 불과 1년 만에 성악 스터디 모임을 주도했다. 비전공자에 실력도 없는 사람이 나선다는 비난에 신경 쓰기보다는, 내가 배운 것을 공유하여 시행착오를 최소화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오페라단을 만들 때도 마찬가지다. 2015년, <시바의 여왕>이라는 오페라의 합창단 200명 중 한 명으로 참여했는데, 성악가들의 소리를 가까이에서 들으니 엄청나게 공부가 됐다. 그래서 한 번도 연습에 빠지지 않았다. 공연할 때는 대기실이 아닌 무대 바로 뒤에 서서 성악가의 소리를 들으며 공부했다. 그 후 아마추어 성악가도 오페라를 해보자며 1년 동안 연습해서, 2017년 <피가로의 결혼> 전막을 무대에 올렸다. 전 세계에서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이 공연은 문화체육관광부 공모사업에 선정되었다.

 

 

오페라단장이고 아트홀 대표지만, 경제적 자립은 아직 멀었다. 예술인복지재단의 긴급지원금과 대출금도 신청했다. 레슨비나 출연료로 약간의 수입은 발생하지만, 하는 일이 많다보니 쓰는 돈이 더 많다. 게다가 다른 모든 예술인과 마찬가지로 코로나로 타격이 컸다. 아내와 딸이 제공하는 “패밀리펀드”가 없다면 생존이 어렵다. 하지만 후회는 없다. 도덕적 갈등과 스트레스에 시달리던 시절 구원으로 다가온 음악은 비로소 삶에서 균형감각을 회복하게 도와주었으니까.

 

이재성 단장에 대해서는 호오(好惡)가 갈린다. 단호한 성격 때문이다. 분위기를 흐릴 수 있다는 이유로 금주령을 내리고 오직 음악의 완성도를 높일 목적으로 공부에 매진한다. 친목을 중시하는 회원들은 그의 단호함이 불편하다. 하지만 그는 시간과 비용을 들여 공연을 보러 오는 사람들에게 최선을 다하는 태도를 보여주지 않는다면 공연을 안 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공연을 잘했다는 말보다는 고생했다는 말을 듣는 게 좋다”고 할 정도로 스스로에게 최선을 다하는 것을 중시한다.

 

 

지금 그는 디지털대학에서 다시 음악을 공부 중이다. 이번에는 발성 등의 실기보다는 이론을 익히고 있다. 오페라단을 이끌다보니, 이론적 전문성과 공연 구조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고 생각되어 새로 마음을 다잡아 공부하기 시작했다. 장기적으로는, 이 고맙고 아름다운 음악을 마을마다 들고 가 어르신들과 함께 할 계획이다. 바로, ‘어른신과 함께 하는 마을회관 음악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