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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를 뛰쳐나간 테너, 돌아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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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프라노 이윤순 기고 |

 

[편집자주] 이 글은 이탈리아 베르가모 국립음대 외래교수로 재직 중인 소프라노 이윤순씨가 현지에서 보내온 소식이다. 16년 전 공연 도중 뛰쳐나갔던 최고의 테너 알라냐가 돌아와 오른 첫 무대에 대한 이야기이다. 

 

2022년 10월15일 토요일, 이탈리아 밀라노 스칼라 극장은 2021/2022년 시즌 후반기 프로그램 움베르토 죠르다노의  오페라 <페도라> 첫 공연을 올렸다.

 

 

이번 공연은 16년 만에 스칼라 무대로 돌아온 테너 로베르토 알라냐 때문에 더욱 화제가 되었는데, 알라냐가 출연하는 페도라 개막일 표는 일찌감치 매진되었고 미처 표를 구하지 못한 사람들은 낮 1시부터 줄을 서서 현장 판매 예약을 기다렸다.

 

코로나 이후 스칼라 극장은 매진된 공연의 표를 구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당일 오후 1시부터 선착순 50명에게만 이름을 적고 번호를 매겨 갈레리아라고 불리는 극장 맨 위층 관람석 표를 구입할 기회를 주고 5시 반에 다시 모이게 한 후 번호순으로 10명씩 끊어 매표소로 들여보내 현장 판매한다.

 

줄서기부터 시작해서 저녁 8시 공연이 시작되는 시간까지 몇 시간을 기다리며 왔다 갔다 해야 하지만 성악을 공부하는 학생들과 오페라 애호가들에게는 저렴한 가격(13유로)에 오페라를 감상할 좋은 기회이다. 다만 운이 좋으면 맨 앞자리에서 시원하게 감상할 수 있지만, 운이 나쁘면 그냥 듣기만 해야 할 수도 있다.

 

 

알라냐는 이탈리아 시칠리아 출신 이민 가정의 아들로 1963년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다. 작은 이탈리아 식당을 운영하는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정식 음악교육은 받지 못했지만 14세 때 ‘위대한 카루소’라는 영화를 보고 성악가의 꿈을 가진 후 음반을 들으며 독학으로 공부해 20대 중반까지 파리 시내의 클럽과 카바레에서 이탈리아 오페라 아리아와 칸초네를 부르며 무명 가수 생활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노래를 듣고 감동한 독지가의 도움으로 정식 성악 교육을 받아 1988년 파바로티 국제 성악 콩쿨에서 1위를 차지하며 성악계의 스타로 발돋움하기 시작한다.

 

잘생긴 외모에 이런 영화 같은 스토리와 더불어 1996년 루마니아 출신 오페라 스타 소프라노 안젤라 게오르규와의 결혼은 그의 스타성을 더욱 높이는 효과를 가져왔다. 그렇게 승승장구하던 알라냐에게 2006년 스칼라 극장과 마찰을 빚는 사건이 일어난다.

 

 

오페라 아이다 공연 1막에서 부른 아리아 "Celeste Aida"(청아한 아이다)의 마지막 고음이 정확한 음정에서 위로 살짝 밀려나 소위 말하는 #되는 현상으로 마무리되었는데 예전부터 까다롭기로 유명한 스칼라 극장의 맹렬 고정 관객들이 야유를 보낸 것이었다.

 

그는 야유를 견디지 못하고 공연 도중 화를 내며 무대 밖으로 뛰쳐나가 분장한 채로 극장을 빠져나갔고 커버(주역 대기)로 있던 테너 안토넬로 팔롬비가 평상복 차림으로 긴급 투입되어 알라냐 대신 라다메스 장군 역할을 이어서 무사히 공연을 마쳤던 일이었다. 그 후 알라냐는 스칼라에 잡혀있던 공연을 모두 취소했고 스칼라 극장도 다시 그를 찾지 않았다.

 

 

그렇게 16년이 지난 올해 스칼라 오페라 공연에 돌아온 것이니 그가 출연하는 오페라 페도라는 화제가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알라냐의 출연으로 오페라 애호가들의 많은 기대와 관심을 모았던 페도라의 첫 공연은 성공적이었다.

 

알라냐는 안정적인 노래와 연기를 보여주었고 대표적인 아리아 "Amor ti vieta"(사랑을 멈출 수 없어)를 부른 후에는 관객들의 아낌없는 환호와 박수를 받았다. 그러나 지나치게 현대적인 연출 때문에 화려한 무대와 의상으로 가득한 오페라의 ‘보는 맛’이 떨어졌던 점은 아쉬웠다. 아니나 다를까? 스칼라의 맹렬 관객들은 마지막 무대 인사에서 연출자에게 아낌없는 야유를 퍼부어 그들의 존재를 알렸다.

 

 

16년 전, 세계에서 가장 잘나가던 40대 전성기의 테너가 무대에서 보인 돌발 행동과는 대조적으로 안정적이고 성숙한 노래와 연기를 보여준 로베르토 알라냐. 뒷얘기를 들어보니 16년 전에는 너무 잘나가던 시절이라 그랬는지, 아이다 공연에 최소한의 연습밖에 참석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번 공연에는 3주 전부터 밀라노에 와서 모든 연습 스케줄을 소화했다고 한다.

 

한국식 나이로 계산하면 올해 60세인 테너 로베르토 알라냐의 성공적인 공연을 보고 ‘와인 같은 남자’라는 표현이 떠올랐다. 잘 익은 와인이 되어 돌아온 그에게 박수를 보낸다. 브라보 알라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