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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이 정책을 바꾼 가장 극적인 사례, 더스트볼을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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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익은 소수가 취하고 파국은 가장 약한 자들이 감당한, 1930년대 미국의 구조적 환경 재앙
사진 한 장, 소설 한 권, 노래 한 곡이 정치가 침묵의 대가를 치르도록 만든 방식
가진 자들의 비용 계산을 바꾼 예술의 힘—더스트볼이 남긴 역사적 교훈

황경하 | 1930년대 미국 대평원을 덮친 더스트볼을 많은 사람들은 자연재해로 기억한다. 하지만 좀 더 정확하게 들여다보면, 그것은 인간이 설계한 욕망의 구조가 자연의 임계점을 넘어섰을 때 일어난 시스템 붕괴였다. 그리고 무너진 잔해는 그 구조를 설계한 이들이 아니라, 그 안에서 가장 작은 톱니로 살아온 사람들 위에 쏟아졌다.

 

이야기를 제대로 따라가려면, 먼저 대평원의 풀밭 이야기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

 

수천 년 동안 미국 대평원을 덮고 있던 것은 키가 사람 허리쯤 오는 대초원 풀들이었다. 겉으로는 단순해 보이지만, 그 아래에는 놀라운 것이 숨어 있었다. 풀 한 포기의 무게 중 최대 90%는 땅 위가 아니라 땅속에 있다. 대초원 풀들의 뿌리는 촘촘한 그물망처럼 토양 표층을 꽉 잡고 있었고, 엄청난 양의 수분과 영양분을 저장했다. 이 뿌리 시스템이 가뭄과 불과 방목으로부터 풀을 지켜냈다.

 

비유하자면 대초원은 땅속에 거대한 스펀지를 품고 있는 것과 같았다. 뿌리가 자라고 죽는 과정이 반복되면서 땅속에 유기물이 쌓였고, 이 유기물이 토양의 수분 보유력을 높였다. 초원의 흙이 그토록 기름진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비가 오면 스펀지에 물이 스며들고, 가뭄이 와도 스펀지에 저장된 수분이 땅을 지탱해 주었다. 오랜 가뭄과 거센 비가 번갈아 찾아오는 기후에서도 대평원의 흙이 날아가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뿌리 시스템이 흙을 붙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뿌리가 사라지면, 그 스펀지도, 그 수분도, 그 흙도 함께 사라진다.

 

 

개척자들은 이 스펀지를 갈아엎기 시작했다. 이주민, 토지 투기꾼, 정치인, 심지어 일부 과학자들까지 '쟁기가 비를 부른다(rain follows the plow)'는 믿음을 공유했다. 농업과 개간이 반건조 대평원의 기후 자체를 더 습윤하게 바꾸어 놓을 것이라는 이 가설은, 서부 팽창을 신성한 의무로 여기는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 이데올로기와 맞닿아 있었다. 정착 초기 몇 년간은 마침 비가 잘 왔다. 착각이 강화되었고, 더 많이 갈았다. 연방 정부는 이 믿음 위에 법을 세웠다. 1862년 자영농지법(Homestead Act)을 시작으로 1904년과 1909년의 확대법까지 이어졌는데, 정부가 배분한 토지는 장기적으로 경제적 자립이 불가능할 만큼 작은 규모였고, 정책이 조장한 토지 투기는 개간을 더욱 가속화했다.

 

거기에 전쟁이 수요를 만들었다. 1차 세계대전 당시 연방 정부가 잉여 농산물 전량을 매입하자, 농민들은 미래 수확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농장과 기계를 넓혀나갔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자 번영은 급속도로 사라졌고, 손실을 만회하려는 농민들은 더 많이 심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를 찾지 못했다. 밀 가격이 폭락하자 가격 하락분을 생산량으로 메우려는 역설적인 행동이 반복되었다. 더 많이 심을수록 가격은 더 내려갔다. 빚을 진 사람은 멈출 수가 없었다. 그것이 레버리지의 속성이다.

 

 

특히 심각한 것은 '서류상 농부들', 즉 비거주 투기꾼들의 존재였다. 이들은 단일 품종 대규모 밀 농장을 투기적 부업으로 운영했는데, 정작 땅에서 살지 않으니 땅이 망가지는 속도를 체감할 이유가 없었다. 가뭄이 닥치자 방치된 그 토지가 인근 거주 농민들의 땅까지 먼지로 뒤덮는 진원지가 되었다. 투기꾼들은 이미 떠난 뒤였고, 떠나지 못한 소농들이 그 먼지를 마셨다.

 

1925년에서 1930년 사이, 풍부한 강수량과 높은 밀 수요, 가솔린 트랙터와 수확 콤바인의 보급으로 3,300만 에이커의 토지가 완전히 벌거벗겨진 채 가뭄을 맞이했다. 수천 년 동안 흙을 붙들어 온 뿌리 시스템이 제거된 땅은 가뭄 앞에서 수분을 잃고 바람에 그대로 노출되었다. 스펀지가 사라진 자리에는 먼지만 남았다. 강한 뿌리 시스템이 파괴된 땅에서 바람은 드러난 표토를 집어 올려 하늘을 며칠씩 뒤덮는 검은 폭풍을 만들어냈다. 이 거대한 먼지 구름은 뉴욕과 워싱턴 D.C.에까지 도달했다. 그리고 1935년 4월 14일, 역사에 '검은 일요일(Black Sunday)'로 기록된 날, 단 하루 만에 약 30만 톤의 표토가 대기 중으로 날아갔다.

 

 

그렇다면 누가 이 값을 치렀을까. 레버리지를 설계한 금융 시스템이 아니었다. 대출을 권장한 정책 입안자들도 아니었다. 투기꾼들은 이미 자리를 피한 뒤였다. 기록적인 밀 풍작을 낸 1931년 이후 불과 1년 만에, 평원 농민의 3분의 1이 세금 체납이나 부채로 인한 압류를 맞이했다. 1934년까지 3,500만 에이커의 땅이 농업이 불가능한 상태로 소멸했다. 1930년대 내내 약 30만 명의 남성, 여성, 아이들이 일자리를 찾아 캘리포니아로 향했다. 출신지와 무관하게 이들은 경멸적으로 '오키(Okies)'라 불렸다.

 

캘리포니아는 이들을 환영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이들의 노동은 환영했지만 이들의 인격은 환영하지 않았다. 대농장주들은 노동자 수가 일자리보다 훨씬 많다는 사실을 이용해 임금을 극도로 낮게 유지했고, 실제로 캘리포니아의 거대 농업 자본가들은 수천 명의 이주민을 끌어들여 값싼 과잉 노동력으로 활용했다. 구조가 만들어낸 피해는 언제나 가장 낮은 곳으로 흘러내렸다. 이것이 더스트볼의 정치경제학이었다.

 

 

이 문제는 오래전부터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정치는 움직이지 않았다. 피해자들이 아직 충분히 조직화되지 않았고, 지도에 표시되지 않는 존재들이었기 때문이다. 변화를 강제한 것은 예술이었다. 정확히는, 예술이 정치의 비용 계산을 바꾸었다. 이 문제를 방치했을 때 치러야 할 정치적 대가를 높인 것이다.

 

도로시아 랭(Dorothea Lange, 1895~1965)은 원래 샌프란시스코에서 상류층 인물 사진을 찍는 성공한 스튜디오 사진가였다. 그러나 대공황이 깊어지면서 그는 카메라를 들고 거리로 나갔다. 무직자와 노숙인들의 표정을 담은 초기 작업들이 주목을 받으면서, 그는 연방 재정착청, 후에 농업안전국(FSA)으로 개칭된 기관의 공식 다큐멘터리 사진가로 채용되었다. 랭은 경제학자 남편 폴 테일러와 함께 더스트볼 난민들의 실상을 기록하기 위해 길을 나섰다. 농업안전국의 사진가들은 1930~40년대 실업, 노숙, 자연재해 등 시대의 굵직한 문제들을 카메라로 기록했고, 이들이 남긴 20만 장이 넘는 사진은 이주 장면과 농촌 생활, 가족의 일상을 촘촘하게 담아냈다.

 

그 방대한 기록 중에서 랭이 찍은 사진 한 장이 20세기를 통틀어 가장 많이 복제된 사진이 된다. 사진의 주인공은 훗날 플로렌스 오언스 톰프슨으로 밝혀진 32세의 여성이다. 남편을 결핵으로 잃은 미망인으로, 일곱 아이를 데리고 완두콩 수확 현장으로 향했다가 일자리도 없고 차마저 고장난 채 캠프에 머물고 있던 참이었다. 랭이 그 순간을 포착한 '이주민 어머니(Migrant Mother)'는 40년 가까이 그 여성의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채 세상에 유통되었다.

 

 

랭의 작업 방식에는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었다. 그는 피사체와 대화하면서 촬영했고, 그들이 내뱉는 말을 사진 제목과 주석에 담았다. 그 개인적인 정보들이 사진을 단순한 이미지가 아니라 한 사람의 증언으로 만들었다. 나이, 처한 상황, 자식의 수가 기록된 사진은 '가난한 누군가'가 아니라 '이름을 가진 이 사람'의 이야기가 되었다. 랭의 사진들은 추상적인 경제 위기를 구체적이고 감각적인 현실로 바꾸어 전국 독자들에게 전달했다. 신문에 사진이 실리면서 독자들은 이 사람들을 '어딘가에 있는 문제'가 아니라 자신이 눈으로 본 사람으로 느끼게 되었다. FSA 사진가들이 찍은 이미지들은 실향한 소작농, 이주 노동자, 그간 보이지 않던 사람들이 겪는 일상의 고난에 광범위한 사회적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사진은 증거였다. 그리고 증거가 공개된 사회에서 정치적 무대응은 단순한 무관심이 아니라 의도적인 방치로 읽히기 시작했다. 정치인들은 더 이상 '몰랐다'고 말할 수 없게 되었다. 랭의 사진이 한 일은 바로 그것이었다. 부인할 수 있는 여지의 제거.

 

존 스타인벡은 더 직접적인 언어로, 더 멀리 나아갔다. 그는 1936년부터 샌프란시스코 뉴스에 이주 노동자 실태를 취재한 르포르타주 시리즈 '수확 집시들(The Harvest Gypsies)'을 연재했다. 각 편에는 도로시아 랭의 사진이 함께 실렸고, 사진과 스타인벡의 예리한 현장 보고는 독자들을 이주민 빈곤의 현실 속으로 끌어들였다. 이 취재 경험이 3년 뒤 발표된 소설 『분노의 포도(The Grapes of Wrath, 1939)』의 토대가 되었다.

 

소설은 오클라호마 농민 가족 조드 일가가 더스트볼로 터전을 잃고 캘리포니아로 향하는 이야기를 따라간다. 스타인벡은 감상적인 피해자 서사를 쓰지 않았다. 소설은 캘리포니아의 연합농장주 협회가 수천 명의 이주민을 유인해 저임금 과잉 노동력으로 활용하는 착취 구조를 정면으로 고발했고, 경찰이 농장주 편에 서서 이주민을 탄압하는 실태를 명시했다. 피해자가 누구인지만이 아니라, 가해 구조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독자에게 보여준 것이다. 그것이 이 소설을 단순한 감동의 서사가 아니라 고발장으로 만들었다.

 

 

출판 즉시 1939년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고, 출판 첫 달에만 8만 3,361부가 팔렸다. 1940년에는 퓰리처상과 전미도서상을 동시에 수상했다. 그러자 이해관계자들이 격렬하게 반응했다. 캘리포니아 농업 자본을 대표하는 연합농장주 협회는 소설을 '거짓말 덩어리'이자 '공산주의 선전'이라 규탄했고, 도서관과 학교에서 금서로 지정했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책을 불태웠다. FBI는 스타인벡을 감시 목록에 올렸다.

 

그런데 이 탄압이 결정적인 역효과를 낳았다. 탄압의 격렬함이 오히려 소설 속 고발 내용이 사실임을 스스로 입증하는 셈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착취 구조를 방어하는 일이, 눈에 훤히 보이는 불의를 공개적으로 옹호하는 일과 구분되지 않게 되었다. 엘리너 루스벨트 영부인은 자신의 전국 신디케이트 칼럼 '나의 하루(My Day)'에 소설 감상을 밝히고, 이후 캘리포니아 이주 노동자 캠프를 직접 방문했으며, 소설의 묘사가 과장이 아님을 공개적으로 확인했다. 소설은 1940년 의회 청문회 개최로 이어졌다. 청문회에서 노동부 장관 프랜시스 퍼킨스는 농업 노동자들을 '사실상의 산업 노동자로 대우해야 한다'며 '들판의 공장'에 임금 규제를 확대 적용할 것을 촉구했다. 스타인벡은 같은 해 루스벨트 대통령과 두 차례 면담했다. 소설 한 권이 정치의 의제를 바꾸어 놓은 것이다.

 

음악은 또 다른 길을 통해 같은 곳에 닿았다. 우디 거스리(Woody Guthrie, 1912~1967)는 오클라호마 출신으로, 18세에 더스트볼의 피해가 가장 심각했던 텍사스 팜파로 이사했다. 1935년 4월 14일 '검은 일요일'의 모래폭풍을 직접 목격하고 이 경험에서 '오래 알고 지내서 다행이야(So Long, It's Been Good to Know You)'를 썼으며, 이후 캘리포니아로 이주하는 농민들의 행렬에 직접 합류했다. 그는 취재를 간 것이 아니었다. 당사자로서 그 길을 함께 걸었다.

 

 

1940년 빅터 레코드를 통해 발표된 앨범 『더스트볼 발라드(Dust Bowl Ballads)』는 더스트볼과 그 영향을 주제로 한 노래들로만 구성된, 음악사상 최초의 개념 앨범으로 평가받는다. 기타 한 자루와 목소리만으로 녹음된 이 앨범은 중서부 이주민들이 캘리포니아로 향하는 여정을 따라가며, 절도, 살인, 극한의 고난을 성경적 서사 위에 펼쳐 보인다.

 

거스리의 노래는 피해자를 연민의 대상으로 그리지 않았다. 그는 "내가 본 것만 쓸 수 있다"는 원칙 아래, 밀 가격 폭락과 은행 압류, 토지 착취 같은 인과관계의 사슬을 직접적이고 반복적인 구조로 노래했다. 과잉생산과 가격 폭락, 빚과 강제 이주, 착취와 빈곤의 고리가 멜로디를 타고 몸속으로 들어왔다. 앨범의 핵심 성취는 경제적·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하면서도 그 대상을 인간적인 언어로 묘사한 데 있었으며, 이를 통해 일반 대중이 미국의 자본주의 체제가 과연 노동 빈곤층의 이익을 대변하는지 의문을 품도록 이끌었다는 것이다.

 

 

거스리가 앨범 라이너 노트에 직접 쓴 말이 있다. "나는 수백만 명의 좋은 사람들이 먼지 속에서 희망을 잃고 살아남으려는 모습을 보았다. 나는 이 먼지와 빠른 바람으로 만들어졌고, 내 정부와 공직자들이 나를 도와준다면 내가 이 둘 다를 이겨낼 것임을 알고 있다." 이것은 간청이 아니었다. 권리를 요구하는 언어였다. 거스리의 음악이 한 일은 바로 이것이었다. 이주민들의 분노에 언어와 정당성을 부여한 것. 분노가 개인의 넋두리가 아니라 구조적 착취에 대한 정당한 이의 제기임을 공인한 것. 거스리에 대해 스타인벡은 이렇게 썼다. "거칠고 코맹맹이 목소리에, 낡은 타이어 림에 걸린 철 막대처럼 기타를 드리우고, 우디에게도 그의 노래에도 달콤한 것은 없다. 하지만 들을 귀가 있는 이들에게는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피트 시거, 밥 딜런, 브루스 스프링스틴 모두 거스리를 직접적인 뿌리로 꼽는다. 더스트볼에서 시작된 노래가 미국 저항 음악의 문법 자체가 된 셈이다.

 

 

세 예술가의 작업은 서로 다른 회로를 통해 같은 곳으로 연결되었다. 랭의 사진은 신문에 실리며 이 사람들의 얼굴을 전국에 퍼뜨렸다. 스타인벡의 기사가 그 사진들 옆에 함께 인쇄되었다. 스타인벡의 소설은 거스리의 앨범과 서사를 공유했고, 거스리는 소설의 인물 톰 조드를 두 편짜리 서사시 노래로 앨범에 직접 담았다. 각자 따로 움직인 것이 아니라, 서로 참조하고 증폭하며 하나의 거대한 압력으로 누적되었다.

 

그 압력이 무엇을 했는지를 이해하려면, 먼저 정치가 어떤 조건에서 움직이는지를 생각해봐야 한다. 정치는 도덕적 각성만으로는 잘 움직이지 않는다. 움직이는 것은 대개 비용이다. 이 문제를 계속 방치했을 때 치러야 하는 정치적 대가가 너무 커질 때, 그때 비로소 정치는 방향을 튼다. 세 예술가가 각자의 방식으로 한 일은 정확히 그것이었다. 침묵의 비용을 높인 것.

 

 

랭의 사진이 전국 신문에 실리는 한, 정치는 '몰랐다'고 말할 수 없었다. 정치가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 가장 편하게 기댈 수 있는 변명은 무지다. 아직 실태가 파악되지 않았다, 정보가 부족하다, 상황을 더 지켜봐야 한다. 그런데 이주민 어머니의 얼굴이 신문 1면에 실리고, 일곱 아이를 데리고 고장난 차 옆에 서 있는 32세 여성의 눈빛이 독자들의 식탁 위에 놓이기 시작하면, 그 변명은 더 이상 쓸 수 없게 된다. 무지를 주장하는 순간 거짓말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사진은 증거였고, 증거는 부인 가능성을 제거했다.

 

스타인벡의 소설은 한 발 더 나아갔다. 사진이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를 보여주었다면, 소설은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를 설명했다. 조드 가족의 이야기가 독자를 울리는 동안, 소설을 관통하는 인과관계의 서술은 독자에게 조용히 물었다. 이 사람들이 이렇게 된 것이 불운 때문인가, 아니면 누군가의 선택 때문인가. 대농장주들이 이주민들을 유인해 임금을 낮게 유지했다는 사실, 경찰이 노동자가 아닌 농장주 편에 섰다는 사실이 소설 속에 명시되는 순간, 이 문제를 외면하는 것은 무관심을 넘어서 아니라 가해 공모에 가까운 무언가가 되었다. 베스트셀러 1위의 소설이 그것을 말하고, 영부인이 그것을 공개적으로 읽고, 수십만 명의 독자가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사회에서, 착취 구조를 방어하는 일은 눈에 훤히 보이는 불의를 공개적으로 옹호하는 일과 다를 게 없어졌다.

 

거스리의 음악은 또 다른 층위에서 작동했다. 사진이 시각을 통해 뇌에 도달했고, 소설이 서사를 통해 이성에 호소했다면, 음악은 몸을 통해 들어왔다. 거스리의 노래를 함께 부르는 이주민들은 각자의 분노가 자신만의 것이 아님을, 같은 구조에 의해 같은 방식으로 피해를 입은 수십만 명이 같은 감정을 공유하고 있음을 느꼈다. 분노가 공유될 때 그것은 집단적 요구가 된다. 개인의 넋두리는 무시할 수 있지만, 조직된 분노는 무시할 수 없다. 거스리의 음악이 이주민들 사이에서 불리는 한, 그들의 분노는 사사로운 불만이 아니라 정치가 응답해야 할 사회적 요구가 되었다.

 

세 가지가 합산되면서 침묵은 더 이상 공짜가 아니게 되었다. 모른다고 할 수 없고, 모른 척할 수도 없고, 알면서 외면하는 것이 이제 공개적인 비용을 치르는 행위가 된 상황. 그것이 예술이 만들어낸 정치적 환경이었다. 예술은 여론에 불을 붙인 것이 아니었다. 정치가 방치를 선택할 때 감당해야 하는 비용의 구조를 바꾸어 놓은 것이다.

 

 

1935년 4월, 루스벨트의 자문관 휴 해먼드 베넷이 토양 보존 입법의 필요성을 설명하기 위해 의회 청문회장으로 향하던 바로 그날, 대평원에서 날아온 먼지 폭풍이 워싱턴 D.C. 상공을 덮었다. 창밖으로 퍼지는 모래 먼지를 바라보며 베넷은 의원들에게 말했다. "여러분, 제가 말씀드리던 바로 그것이 지금 저기 있습니다." 의회는 그해 토양보존법을 통과시켰다. 설립된 토양보존청은 경사면 경작법, 윤작, 무경운 농업을 농가에 현금을 지급하며 보급했고, 캐나다에서 텍사스에 이르는 100마일 폭의 방풍림 조성 사업을 통해 2억 그루의 나무가 심어졌다. 미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환경 복원 프로젝트였다. 1938년에 이르러 비산 토양의 양은 65% 줄었다.

 

돌아보면 더스트볼은 예고된 재앙이었다. 개발 욕심이 레버리지를 끌어다 쓰며 자연 자원을 과도하게 추출할 때, 이익을 먼저 취하는 자들은 따로 있고 비용을 감당하는 자들은 따로 있다. 그 비대칭이 오랫동안 방치될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하나였다. 피해자들이 아직 충분히 가시화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스트볼이 우리에게 남긴 것은 환경 정책의 변화만이 아니다. 예술이 구조적 불의를 가시화하고, 무시의 비용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높일 때, 정치가 비로소 움직인다는 사실이다. 당시의 사진들이, 그 소설이, 그 노래들이 지금도 읽히고 전시되고 불리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