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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통감'에서 내면의 '잔해'로... 재즈 베이시스트 정수민, 5집 [잔해]로 들려주는 남겨진 것들의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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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이래 사회와 내면을 응시해온 독보적 작곡가
상실의 시대를 지나 도달한 깊은 사색의 공간을 말하는 가장 낮은 목소리

 

황경하 | 재즈 베이시스트이자 작곡가 정수민이 그의 다섯 번째 정규 앨범 [잔해 (Remnants)]를 들고 돌아왔다. "남은 것들을 정리했다. 사라진 것, 남겨진 것, 그 사이 어딘가에 있던 것들. 기억은 정확하지 않고, 감정은 오래 가지 않는다. 이건 그냥, 그 이후의 소리다." 앨범을 여는 이 짧은 글귀는, 데뷔 이래 줄곧 사회의 소외된 풍경과 인간 내면의 깊은 감정을 탐구해온 그가 도달한 새로운 음악적 경지를 암시한다. 이번 앨범은 사건의 중심이 아닌 그 주변부, 폭풍이 아닌 그 후의 고요함, 기억이 아닌 기억의 흔적을 소리로 그려내는 깊은 사색의 공간이다.

 

베이스를 든 철학자, 시대를 연주하는 베이시스트

 

 

정수민은 현대 한국 재즈 씬에서 가장 뚜렷한 자기 언어를 가진 아티스트 중 한 명이다. 그는 콘트라베이스라는, 묵묵히 뒤를 받치는 역할에 머무르기 쉬운 악기를 전면에 내세워 시대와 인간에 대한 날카로운 질문을 던져왔다. 

 

그의 철학은 2018년 데뷔 앨범 [Neo-liberalism]에서부터 선명했다. 강남의 마지막 판자촌 '구룡마을'의 주소를 딴 '강남 478'과 같은 곡을 통해 젠트리피케이션의 상처와 도시의 비정한 이면을 서정적인 재즈 선율로 담아내며 평단의 주목을 받았다. 이어진 2집 [통감 (Sense of Agony)]에서는 민중가요를 재해석하며 시대의 아픔에 '공감'하는 태도를 보여주었고, 3집 [Lament]와 4집 [자성]에서는 사회적 시선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개인의 내면으로 깊이 파고들었다. 특히 그가 인터뷰에서 자신의 '부채의식'을 가장 정확하게 표현했다고 밝힌 '빚(Debt)'은 그의 음악이 단순한 현상 스케치를 넘어 얼마나 깊은 자기 성찰에 기반하는지를 보여준다.

 

이처럼 그의 디스코그래피는 '사회적 아픔'에서 '내면의 고뇌'를 거쳐, 마침내 모든 것이 지나간 후의 상태를 다루는 [잔해]로 귀결되는 하나의 거대한 서사를 이룬다. 네 번의 정규 앨범이 연이어 한국대중음악상 최우수 재즈 음반 부문에 노미네이트된 것은, 그의 이러한 일관되고 깊이 있는 예술관이 평단과 대중 모두에게 강한 울림을 주었음을 증명한다.

 

잔해의 미학, 섬세한 앙상블로 빚어낸 소리의 풍경

 

 

[잔해]는 미니멀한 편성 속에서 각 악기가 지닌 소리의 본질과 질감을 극대화한다. 앨범의 중심을 잡는 것은 단연 정수민의 더블 베이스다. 그의 연주는 앨범 전체의 서사를 이끌어가는 중심 화자(話者)처럼, 낮은 음역의 선율로 공간의 깊이와 온도를 조율한다. 때로는 고요히 읊조리고, 때로는 깊게 탄식하며 듣는 이의 감정을 이끈다.

 

여기에 국내 최정상급 연주자들의 섬세한 호흡이 더해져 앨범의 완성도를 높인다. 특히 세 명의 피아니스트는 각기 다른 색채로 앨범의 다채로운 표정을 만들어낸다. 앨범의 문을 여는 '사라진 자리'와 '오래 머물렀다', 그리고 마지막 트랙 '데모 1'에서 피아노를 연주한 이보람은 섬세하고 서정적인 터치로 앨범의 주된 정서적 기조를 다진다. 이어 '머물던 온기'에서 진수영의 피아노는 따스하면서도 아련한 감성을 그려내고, '겨울이었나 여름이었나'와 타이틀곡 '잔해'에서 송하균의 피아노와 신디사이저는 색다른 질감과 공간감을 극대화한다.

 

다른 연주자들의 역할 또한 빛난다. '겨울이었나 여름이었나'에 참여한 이규재의 플룻과 강석헌의 퍼커션은 쓸쓸한 계절의 풍경을 눈앞에 펼쳐 보이고, '문 앞에서'에서 이시문의 기타는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빛처럼 서정적인 선율로 고독의 순간을 채운다. 타이틀곡 '잔해'에서 울려 퍼지는 브라이언 신의 트럼펫은 앨범의 주제를 응축적으로 보여주며, 무너진 폐허 속에서도 발견하는 한 줄기 빛과 같은 처연한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이번 앨범에서도 목소리의 활용은 인상적이다. 해파와 김일두라는, 각기 다른 개성을 지닌 두 보컬리스트는 가사를 전달하는 것을 넘어 목소리를 하나의 악기처럼 사용하며 앨범의 추상적인 풍경에 구체적인 질감을 부여하고 음악의 일부가 된다.

 

모든 것이 사라진 자리에서 비로소 들리는 것들

 

정수민의 [잔해]는 역설적으로 '비어 있음'과 '남겨짐'을 통해 가장 꽉 찬 감정적 경험을 선사하는 앨범이다. 화려한 솔로나 폭발적인 에너지를 기대하는 리스너에게는 다소 불친절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의 안내에 따라 소리의 결을 차분히 따라가다 보면, 사라진 것들의 빈자리에서 비로소 피어나는 처연한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는 사회의 가장 낮은 곳을 향했던 시선이 이제 인간 존재의 가장 근원적인 고독과 상실감에 닿아있음을 의미한다. [잔해]는 정수민이라는 아티스트가 자신의 음악적 철학을 더욱 깊고 단단하게 다져가고 있음을 증명하는, 2025년 가장 주목해야 할 음반 중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