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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 디자이너로 일하는 드럼써클 퍼실리테이터 박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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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학에서 출발, 아프리칸 음악 회사 ‘아토’ 설립
악보나 사전 연습 없이 다중 연주 가능하도록 이끈다

뉴스아트 김시우 기자 |

 

아프리칸 타악 연주자이자 드럼써클 퍼실리테이터 박재용씨는 특별한 예술인이다. 반도체 디자인을 하는 예술인이라서가 아니다. 평범한 삶을 살다가 취미가 직업이 된 예술인은 많지만, 박재용씨처럼 본캐와 부캐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경우는 드물다.

 

 

그는 천성이 유쾌하고 낙천적이라 코로나 시기에도 의연했다. 통상 연초에 확정되는 연간 공연이 전부 취소되어 시간이 많아지자 아예 1년은 놀겠다 마음먹었다. 딸과 실컷 놀며 친해지고 캠핑도 많이 다녔다. 그러다가 코로나 장기화로 정말 어려워질 무렵, 예술인파견지원사업을 알게 되었다

 

“스마트협동조합을 통해 예술인 지원 프로그램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어요. 예술인파견지원사업을 하게 되었고, 정보를 많이 얻게 됐지요. 홍대 마포 등 좁은 세계에서만 살았는데 조합에서 다양한 예술인들과 만나면서 정말 재미있었어요.”

 

재미는 있었지만 넉넉하지 않은 생활을 해가던 중 이전 직장 동료들이 안부를 물어오더니 회사로 복귀하라고 했다. 그만둔 지 무려 9년이나 지났는데 말이다. 그래서 이 예술인은 지금 무려 반도체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다. 스스로 아웃사이더 기질이 강하다지만, 퇴사 후 9년이 넘은 회사에 복직하다니 이 정도면 핵인싸다. 

 

 

“어려서부터 기계를 좋아했고 비행기 분야에 관심이 있었는데, 극소수만이 그 분야에서 일할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기계자동차공학과를 갔죠. 여기를 졸업하면 다들 연구소나 대기업을 선호하는데, 저는 원래 아웃사이더 기질이 있어서 그런지 그건 싫더라고요. 일 많고 자기 시간 없고, 지방 근무해야 하고...”

 

그래서 중소 반도체장비 제작설계 기업에 입사했다. 낮에는 회사원으로, 밤에는 밴드의 드러머로 살면서 3년 뒤에는 창업할 예정이었다. 이때만 해도 음악 기업을 창업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런데 후배의 소개로 접한 젬베라는 악기를 통해 아프리카 음악에 푹 빠져 아예 회사를 그만두고 본격적인 체험을 위해 하와이로 향했다.

 

“이 음악은 전체의 일원으로 연주할 때 훨씬 재미있거든요. 더 큰 재미를 찾아 하와이에 간 김에 아예 드럼써클 퍼실리테이터 자격과정을 밟고 돌아와 ‘아토’라는 아프리카 음악 회사를 창업했어요. 분야는 전혀 달랐지만 3년 뒤 창업한다는 저와의 약속을 지킨 셈이죠 ㅎㅎ.”

 

 

미국 해변가에서는 자유롭게 타악기를 연주하고 그에 맞춰 주변에서 춤을 추는 사람들을 적지 않게 볼 수 있다. 이들은 스스로를 드럼써클 그룹이라고 한다. 드럼써클은 많은 사람이 서로를 방해하지 않으면서도 악기를 자유롭게 연주할 수 있도록 체계화한 프로그램이다. 그리고 이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연주를 도와주는 사람을 드럼써클 페실리테이터라고 한다.

 

박재용씨가 연주하는 아프리칸 음악의 최소 단위는 젬베라는 타악기 연주자 2명, 둔둔이라는 타악기 연주자 1명이다. 여기에 추가 악기나 다른 악기가 결합되어 구성원이 늘어날 수 있는데, 퍼실리테이터가 개입하면 악보나 사전 연습 없이도 다중의 흥겨운 연주가 가능하다.

 

 

‘아토’ 창업 당시에는 이 음악을 연주하는 사람이 한국에 5~6명 뿐이었고, 아프리카 음악팀도 2개 뿐이었다. 시장도 없고 배울 곳도 마땅치 않았다. 그래서 아프리카 친구들이나 아프리카 현지를 다녀온 사람들에게서 정보를 구해 독학으로 익히고, 일본 등의 해외 연주팀을 찾아가 배웠다. 그렇게 익힌 음악을 안양여자소년원이나 미얀마 예술난민학교 등에서 연주했다.

 

그러던 중 마포구청에서 연락이 왔다. 예술활동으로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고 싶다고 했더니 사회적기업으로 전환할 것을 제안하고 여러 가지 지원을 해 주었다. 묘하게 빠져드는 음악적 매력에 구청의 지원이 더해지자 프로그램 요청이 늘었다. 단체활동에 도움이 되고 교육적 효과가 커서 꾸준히 인기를 누리게 되니, 매출 걱정 없이 실컷 연주 활동을 하면서 정신없이 살았다. 코로나가 오기 전까지는.

 

 

박재용씨는 회사를 그만두고 예술인으로 사는 동안 연주나 음악 활동 이외에도 필요한 일은 뭐든 다 했다. 그 업무 중에는 디자인 관련된 일도 많았다. 그걸 직접 해 왔기에 9년의 공백에도 바로 업무에 복귀할 수 있었다.

 

음악은 먼저 간 사람이 거의 없는 좁은 길을 걸었지만, 전공과 직업을 선택할 때나 창업 뒤 여러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는 일의 범위를 넓게 잡아 많은 종류의 일을 직접 했다. 그는 낡은 오토바이를 분해해 직접 수리하여 되팔 수 있는 능력도 있고 자동차정비자격증도 있다. 그래서인가 학교에서 커리어패쓰 강연을 해 달라는 요청도 종종 들어온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최대 무기는, 선택에 대한 책임이다.

 

누구의 도움에도 기대지 않고 자기 선택에 몰입하여 필요한 일을 피하지 않고 해 내다보니 할 줄 아는 것도, 오라는 곳도 많다. 긴 인터뷰 시간 동안에도, 그리고 예술인에게 유독 혹독했던 코로나 시기를 이야기하면서도, 그에게서는 단 한 마디도 부정적인 말을 들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물었다. 살면서 가장 후회하는 일이 뭐냐고.

 

“음.... 거의 없는데.... 뭐... (직접 수리한) 오토바이를 너무 싸게 팔았어... 정도랄까요?”

 

 

활짝 웃는 그가 입고 있는 옷에 적힌 ‘우주의 먼지’라는 말이 ‘우주의 금수저’로 보일 정도로 그는 반짝반짝 빛이 났다. 본캐와 부캐를 자유자재로 오가며, 지금 이 순간에 남김 없이 몰입하는 예술인, 박재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