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능력주의 걷어낸, 장애인 춤의 미학

URL복사

뉴스아트 이명신 기자 |

 

팔다리가 자유롭지 못하거나 심지어 신체 일부 기능을 완전히 상실한 사람의 춤은 어떠할까?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은 춤을 출 수 있을까? 춤을 잘 춘다 못 춘다의 기준은 무엇일까?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은 2022년 국정감사 자리에서 장애인은 비장애인처럼 춤출 수 없기 때문에 앞으로도 선발할 계획이 없다고 말함으로써 나름대로의 기준을 제시한 바 있다. 그러나 이 구시대적이고 식상한 기준은 산산 조각이 나고 있다. 

 

모든 선입견과 한계에 도전하며 근본적으로 다시 던지는 질문

 

지난 4월 20일 장애예술인의 몸짓무용 활성화 토론회에서 소개된 "김원영 X 프로젝트 이인 <무용수-되기>"프로젝트(이하 프로젝트 이인)는 장애예술에 대한 질문을 넘어서서, 우리가 설정한 모든 선입견과 한계에 도전하며 근본적으로 다시 질문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뉴스아트에서 토론 내용을 소개한다.

 

프로젝트 이인 연출가인 라시내씨는 스스로를 등록된 장애는 아니지만 장애를 가진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그는 공연예술연구자로서 몸의 가능성을 탐구한다. 그 과정에서 '연극하는 변호사' 원영이 휠체어를 이용해야 하는 자신의 몸을 무용으로도 확장하였다.

 

 

장애인의 몸은 움직임이 자유롭지 않고, 결여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우리 사회는 이런 장애와 장애인이 특히 대중에게 노출되는 것을 기피한다. 그런 점에서 장애인 시설은 '도움'의 의미도 있지만 '은폐'의 의미도 있다. 

 

그래서 장애인들에게 무용, 춤은 다른 장르에 비해 낯설다. 미술이나 음악에 종사하는 장애예술인에 비해 예술인 수도 훨씬 적다. 외화된 매개체를 통하지 않고, 보통은 자신의 몸을 직접 보여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비장애중심주의/능력주의 자체가 문제

 

라시내는 예술 분야에서 비장애중심주의/능력주의 자체를 문제삼는다. 그로부터 장애예술 개념이 출발한다. 그렇지 않으면 장애예술은 비장애인이 춤출 때 장애무용수가 주변적 역할로 등장하여 '인간승리'나 '기적'을 보여주는 역할로 전락한다. 그것은 예술이 아니다. 

 

그에 따르면, 춤이 되는 움직임과 그렇지 않은 움직임이 정해져 있지 않다. 무용은 '몸'이 하는 일인데, 이 때 '장애가 없는 몸'을 전제로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문제는 '몸'에 대한 우리의 사유이다. 이를 보여주고 검증하기 위한 것이 프로젝트 이인이다. 

 

 

프로젝트 이인에서, 하체가 가볍고 상체가 강한 원영은 길고 무거운 하체를 상체로 지탱해야 하는 기섭보다 훨씬 수월하게 움직인다. 이런 점에서 장애예술의 미학은 "미학 자체를 쇄신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기존의 규범과 관습을 재고하고 그 너머로 나아가는 작업을 요구한다. 

 

이분법적 사유를 무력화 하고 차이를 동일성의 체계로 포섭

 

이러한 장애예술의 미학적 가능성은 예술 자체를 새로이 하는 가능성으로 존재한다. 프로젝트 이인의 '무용수-되기'란, 나의 정체성을 버리고 다른 정체성으로 옮겨가는 것이 아니라, 이분법적 사유를 무력화하고 차이를 동일성의 체계로 포섭하는 것이다.

 

원영은 그 자신의 <트리오 A>를 뛰어나게 잘 출 수 있고... 비교 자체를 거부하는 그의 '고유한 춤'... 나는 원영의 춤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의 춤이 아름다운 것은 그가 자신의 한계 너머에서 춤추기 때문이 아니라... 가장 멀리까지 나아간 한계에서 춤추고자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 라시내

 

 

동일성으로 포섭하는 작업은 관객에게도 적용된다. '관객은 어떤 몸인가'라는 미학적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작품형식에 맞는 객석이 준비되어야 한다. 그래서 프로젝트 이인은 시각장애인에 대한 음성해설을 윤리적 당위나 법적 의무의 범주에 묶어두지 않고 공연의 일부로 끌어들였다. 

 

관객 입장 후 암전이 되면, 어둠 속에서 자막과 음성이 먼저 나온다. 이는 관객에게 정보의 과잉으로 여겨질 수도 있고, 실제로 펼쳐지는 공연과의 불일치일 수도 있다. 언어와 실재에는 간극이 있는데 이 간극은 무엇으로도 메꿀 수 없다. 그래도 우리는 멈추지 않고 쓰고 말한다. 

 

장애는, 한계를 통해 유한성을 이해하고 실재를 다시 본다

 

마찬가지로 안무와 춤 사이에도 언제나 간극이 있다. 그러나 그 간극이나 한계가 우리를 결정할 수는 없다. 누구의 몸도 온전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장애가 있는 몸은 그러한 몸의 유한성에 대하여 근원적으로 이해하게 하고 몸의 실재를 다시보게 한다. 장애는 몸들의 예외가 아니라 범례다.

 

고대로부터 필멸의 이야기는 예술이 다루어야만 하는 주제이다. 장애예술은 인간의 몸은 유한하다는 사실을 마주하는 작업이고, 주체의 개념 그 자체를 문제삼는 작업은 동시대 예술의 과제 그 자체다. 

 - 라시내

 

서울문화재단의 장애예술창작센터는 15년 전 '장애'라는 말을 떼어냈다가 최근에 다시 붙였다. '장애'라는 말을 붙이는 것에 대한 부담감을 보여주는 일이다. 이들은 장애예술을 없어지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고도 했다. 

 

차이를 인정하고 고유함을 추구하는 뇌성마비인들의 춤

 

뇌성마비 장애인들과 무용작업을 하는 아트엘의 노경애 안무가는 비장애인의 자연스러운 몸의 움직임이 춤이 되는 방식을 찾고 있다. 비장애인과 달리 장애인은 몸을 지탱하는 균형점이 다르고 보통은 몸의 축이 다양하기 때문이다.

 

무용에서는 오랜 시간 완벽한 균형을 추구해 왔지만, 장애 무용에서는 불균형이 균형을 찾으며 발생시키는 다변성과 새로운 운동성에서 가능성을 찾는다. 그리고 이런 움직임은 오랜 시간 고정되어  온 무용의 언어에 질문을 던진다.

 

비장애인은 특정한 것을 추구하지만, 장애인은 차이를 인정하고 고유한 움직임을 추구하는 것이다.

 

 

시각장애인은 보고 따라할 수 없기 때문에 춤을 춘다는 것과 더욱 거리가 멀어보인다. 룩스빛아트컴퍼니에서는 시각장애인이 춤을 출 수 있는 무용교육을 하고 있다. 이들은 장애예술인이 아니라, 눈이 보이지 않는 불편함이 있는 예술인이고싶다. 

 

탁월함은 기존 범주 내에서의 경쟁이 아니라 가능성에서 나온다 

 

오세형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 공연장 추진단장은 2019년에 있었던 공연을 소개하면서 미학적 쇄신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조건 On one condition (댄 도우)>이라는 공연에서 뇌병변 무용수는 10분에 걸쳐 양말을 신는 모습을 퍼포먼스로 보여주었다. 몸을 혹사하여 기존의 범주에 맞추려는 수월성을 보여주는 방식이 아니라, 취약한 몸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퍼포먼스였다.  

 

문체부는 윤석열 정부의 약자 프렌들리 기조에 따라 장애예술인 창작과 발표 기회를 확대하기 위해 역대 정부 최초로 '장애예술인 문화예술 활동 지원 기본계획'을 수립하고, '장애예술인 창작물 우선구매 제도' 도입, '장애예술인 표준 공연장(서울 충정로)' 마련 등 장애인 프렌들리 정책을 꾸준히 추진하고 있다. 

 

이날 토론에서는, 장애예술정책이 단지 약자에 대한 배려가 아니라 예술인 개인의 정체성과 개별성을 반영하는 방식으로 가야 한다고 하였다. 장애인이 만든 미술품을 사들이거나 스타급 장애인 예술인에 의지하여 붐업하는 방식은 구태의연한 인간승리 모델에서 벗어날 수 없다. 게다가 이런 방식은 오히려 양극화를 통한 문제 은폐와 내부 갈등을 가져올 수 있다.

 

통치술의 하나로 장애인을 이용한다는 말을 듣지 않으려면, 장애예술미학에서 제시하는 능력주의와 이분법의 배제, 한계를 인정하고 있는 그대로 보기, 고유함에서 나오는 가능성 등을 정책 전반에 반영해야 할 것이다.

 

관련기사 장애예술의 무한 가능성 - 장애인차별철폐의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