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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왈츠 포 사일런스'展, 작가 허진 초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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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1일(목) ~ 10월 14일(토) 아트레온 갤러리

뉴스아트 김시우 기자 |

 

십여년 넘게 동물에 천착해 온 허진 작가의 ‘왈츠 포 사일런스’ 展이 신촌에 위치한 아트레온 갤러리에서 열린다. 그의 34번째 개인전이다. 그는 지난 3월 예술인상호부조대출 기금마련을 위한 '씨앗페'에도 참여한 바 있다.


작가 허진은 추사 김정희의 수제자인 소치 허련의 고조손이며 한국의 서정을 담은 신남화를 이뤄내며 수많은 후학을 길러낸 남농 허건의 장손으로, 운림산방의 화맥을 5대째 이어오고 있다. 컬러풀한 색감과 화면을 꽉 채운 구도는 전통 회화와는 거리가 있어 보이지만, 남종화가 외적인 대상의 사실 묘사와 형상보다는 내적인 뜻을 그리는 사의를 중시하는 흐름이었던 것을 살펴보면 허진의 작품에 그 정신이 흐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번 전시는 기억의 축적이 곧 역사이며 또한 역사가 개인의 자의적 해석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는 점에 착안했다. 작가의 다층적 기억을 인문학적 입장에서 재해석하여 회화적으로 평면에 풀어낸다. 

 

 

<유목동물> 연작에서 동물, 도구와 기계, 인간은 무작위로 화면에 배치되지만, 크기, 색상, 표현법은 소재에 따라 별도의 정해진 형식이 있다. 형태의 묘사는 실재하는 대상을 따르지만 채색은 실제 모습에 구애되지 않는다. 동물과 달리 인간의 형상은 윤곽만 드러내는 실루엣 기법으로 직립 보행을 하는 존재임이 확인될 뿐, 개별성이 드러나지 않는다.

 

<이종융합동물+유토피아> 연작에서 그는 유전공학과 생명공학 기술로 탄생한 기이한 융합동물을 부각시켜 생태계를 교란시키는 물질문명에 대한 경각심을 담고 있다. 작가에게 있어 이종융합동물과 인간, 물질문명은 모두 같은 운명 공동체이며, 문명의 발달 속에서 융합과 해체를 오가며 서로를 위태롭게 하는 존재가 되어가고 있음을 보여 준다. 반면, 검은색으로 화면 전반에 흩어져 표현된 섬들은 태곳적부터 거기에 있었던 산수풍경처럼 고요하면서도 단단하게 자리하고 있다. 이 섬들이 바로 작가가 제시하는 유토피아다.

 

 

<유목동물+인간-문명> 연작도 위와 같은 선상에서 작업 되었다. 과학문명숭배에서 비롯된 폐해를 치유하고자 하는 환경 친화적 생태론을 기반으로 하여 형상화한 연작들이다. 자유로운 유목동물을 자유롭고 복잡다단하게 배치하는 이미지의 나열은 자연과의 상생과 조화를 강조하는 작가의 소망과 열정을 드러낸다. 부유하는 흑백 인간 군상과 사물들은 기술 중심 문명의 허구성과 익명화된 인간의 피폐성이 부각되게 한다. 

 

인간은 거의 모든 종류의 욕망을 동물에 투사해 왔다. 허진의 동물 연작은 문명 시대를 거치며 인간이 동물에 투사하고 부과해 온 욕망을 거두어 보자고 제안한다. 그림의 기원을 탐구하여 시원적 그림을 남기고 싶은 화가의 욕망만은 그대로 남겨둔 채 말이다. - 최석원(서울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화과)

 

 

1990년대에 삼십 대의 허진은 <다중인간>과 <익명인간> 연작 등을 통해 과거와 현재, 자연과 문명이 혼성된 시공간을 배경으로 분열적이고 몰개성적이 되어 가는 현대인의 초상을 그려 냈다. 그는 90년대 말의 <익명인간> 연작에서부터 식물, 산수 등과 함께 자연을 상징하는 소재로 동물을 그려 넣기 시작하여, 2000년대 중반부터는 야생 동물을 화폭 전면에 내세운 <유목동물>과 <이종융합동물> 연작을 작업의 주축으로 삼아 왔다. 허진의 관심사는 인간에서 동물로 진화한 셈이다.

 

허진은 동물로 표상되는 야생의 자연과 기계로 상징되는 물질문명의 두 세계 그리고 그 사이에 존재하는 인간에 대해서 사유하는 화가이다. 허진은 동물 연작으로 질문을 던진다. 사라져 가는 자연과 지속 가능해 보이지 않는 문명의 이중 위기 속에서, 폴 고갱도 물었듯,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