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오 작가 | 동쪽에 있는 신의 땅, 동검은이오름. 원형분화구와 말굽형분화구가 모두 있는 특이한 오름으로, 정상에서 보이는 4개의 봉우리 외에 거미줄처럼 뻗어나가는 귀여운 알오름이 여러 개. 너른 들판엔 황소울음이 들리고 저 멀리 성산일출봉과 우도, 섭지코지도 보인다. 함부로 오솔길로 들어서지 마라 길 잃는다.
김수오 작가 | 빛알갱이들이 운무를 뚫고 백약이 오름에 오른다. 백약이 오름은 온갖 약초가 피어나는 곳. 찔레나무 이뇨제, 오이풀 지혈제, 층층이꽃 감기약 복통에는 방아풀, 무릎 아프면 쇠무릎, 열 내릴 때 하눌타리 하지만 무엇보다도 좋은 약은, 백약이 오름의 아름다움. 길 끝에 탁 트인 전경과 멀리 보이는 어머니산 한라산.
김수오 작가 | 여러 개의 분화구로 이루어진 용눈이 오름, 제주 동쪽에서 가장높은 오름이다. 사진가 김영갑을 사로잡은 흘러내리는 곡선미. 그는 여기서 평화로움과 이상세계를 봤다고 한다.
김수오 작가 | 제주 동쪽 바다를 품고 봄에는 철쭉, 가을엔 억새로 꾸며져... 아름답기로도, 높이로도 손꼽히는 다랑쉬 오름. 그 옆에 사이좋게 붙어 있는 자그마한 오름, 아끈다랑쉬. 석양에 4·3의 원혼들을 부르는 듯, 다랑쉬굴 가는 길가 붉은 만장만 깃발처럼 휘날린다. 작가의 말 : 4·3때 해안마을 사람들이 다랑쉬굴 속에 피신해 있다가 토벌대에게 발각되어 굴속에서 모두 질식사하였다. 40여년의 세월이 지난 1992년, 당시 같이 피신했다 살아난 마을분의 증언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당국은 이 때 발견된 유골을 모두 화장해 유족들이 배를 타고 나가 직접 바다에 뿌리도록 압박했다. 제주 4·3평화공원에는 당시 굴속에서 발견된 엄마와 아이들 등 십여구의 백골이 '재현'되어 있다. 나중에 유족들은, 뼈조각 하나라도 남겨두었으면 무덤이라도 만들어주었을텐데 수십 년 굴속에 갇혀있다가 햇볕을 보자마자 다시 수장되었다고 안타까와했다. 마지막 사진은, 올해 4월 다랑쉬굴 30주기를 맞아 원혼을 위무하기 위해 위령제와 위령돌탑을 쌓는 행사를 했고 이를 위해 다랑쉬굴 가는길에 걸린 만장의 모습을 촬영한 것이다.
김수오 작가 | 예상치 못한 비극에 힘든 주말이었습니다. 8년이라는 시간이 있었는데도 우리는, 피우지도 못하고 져버린 젊음을 또 이렇게나 많이 보태고 말았습니다. 제주 일만 팔천여 신 가운데 동쪽 신들의 본향인 송당 당오름에서, 젊은 영혼들의 명복을 빕니다.
김수오 작가 |
김수오 작가 | 굼부리 안 삼나무숲 품은 아부오름 (편집자주) 굼부리는 구멍이라는 뜻으로 여기서는 분화구를 말한다.
김수오 사진 | 별이 빛나는 밤, 아부오름에서 바라본 한라산과 오름.
뉴스아트 이명신 기자 | 본 지에 <제주다움>을 연재 중인 김수오 작가의 사진책 <섬오름 이야기 신들의 땅>이 나왔다. 작곡가 최창남이 글을 쓰고 김수오 작가의 사진을 실었다. 지금은 휴양지이자 낭만적인 섬으로 주목받는 제주이지만 사실 제주의 삶은 척박함 그 자체였다. 육지에서 쌀밥을 먹던 70년대에도 논농사가 불가능한 제주에서는 조밥을 먹었을 정도이다. 그 이전에는 더 피폐했다. 고려시대에는 최영 장군이 이끈 군대가 온 섬에 피의 강이 흐르게 하였고, 조선시대에는 유형의 땅으로 핍박과 착취를 당했고, 해방 정국에는 4.3사건으로 제주 도민 3분의 1이 죽음을 당했다. 죽음에 연루되지 않은 가족이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런 제주는 사실 신들의 땅이다. 바다와 오름에 설문대할망을 비롯하여 무려 1만 8000여 신들이 산다고 한다. 이런 전설에 고개가 끄덕여질 정도로, 그리고 잔혹한 역사에 대한 보상이기라도 하듯, 제주의 풍광은 아름답다. 제주가 고향인 김수오 작가는 육지에서 대학을 나오고 다시 제주로 돌아왔다. 낮에는 한의사로 일하고 출근 전과 퇴근 후에는 카메라를 들고 제주 곳곳을 누볐다. 삶의 터전을 파괴하고 자연을 훼손하는 난개발
김수오 사진, 영상 | 비가 온다. 바람이 분다. 태풍이 온다. 가느다란 다리로 우뚝 서고 여윈 몸으로 버틴다. 난생 처음 보는 혼돈 속에서도 의연할 수 있는 건 엄마들이 지켜주니까 방패처럼 기둥처럼, 엄마들이 지켜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