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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얀이 세 번 녹음한 <레퀴엠>, 나의 최애 버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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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지의료재단 이왕준 이사장 |

 

얼마 전 정명훈 지휘의 베르디 <레퀴엠> 공연 리뷰를 올린 후 많은 분들이 같은 질문을 해 오셨다. '내가 제일 선호하는 음반이 뭐냐'는 것이다. 

 

나의 최애 음반은 이 글의 말미에 자세히 기술하는 걸로 하고 먼저 베르디 레퀴엠과 관련한 몇가지 중요한 녹음과 영상을 소개하고자 한다. 


맨 처음 언급할 지휘자는 뭐니뭐니해도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다. 왜냐하면 그보다 더 베르디 레퀴엠에 많은 공력을 쏟았던 지휘자도 없었고 시기별로 괄목할 만한 명반 연주를 3개 버전이나 남겼기 때문이다.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최고 전성기 시절, 첫 번째 <레퀴엠>

 

우선 첫번째는 라 스칼라 버전의 1967년 녹음이다. 카라얀이 당시 59세로 베를린필 상임지휘자면서 라 스칼라 극장 감독도 겸하고 있을 때이다. 한마디로 카라얀의 최고 전성기 시절이다. 여기 나오는 4명의 독창자들 역시 카라얀이 키워 낸 당시 막 떠오르던 신성新星들이다. 레온타인 프라이스(40)-피오렌짜 코소토(35)-루치아노 파바로티(32)-니콜라이 기아우로프(38).

 

 

녹음하기 12년 전, 28살 흑인 여가수 레온타인 프라이스를 뉴욕 연주 투어 오디션에서 발견하고 3년 후 아이다 역으로 라 스칼라와 빈 국립극장에 데뷰시킨게 카라얀이었다. 여기에 32살로 이제 본격적으로 커리어를 시작하는, 정말 싱싱하고 몸매도 날씬한 루치아노 파바로티의 미성과 박력을 볼 수가 있다. 전설의 베이스 기아우로프의 초기 모습도 너무 신선하다. 불가리아 출신으로 20세기 최고의 베이스로 불라는 니콜라이 기아우로프Nicolai Ghiaurov도 사실은 카라얀이 59년도 라 스칼라에 데뷰시키면서 세계적 가수로 성장하게 된 것이다.

 

베를린필과 함께 한 카라얀의 두 번째 <레퀴엠>

 

두번째 녹음은 1972년 베를린필 버전이다. 이번에는 미렐라 프레니와 크리스타 루드비히가 콤비를 이루었다. 미렐라 프레니는 파바로티와 동향 소꼽친구로 70대년대를 풍미한 최고의 리릭소프라노 중 한명이다. (파바로티-프레니-카라얀의 <라보엠> 녹음은 전설이다)

 


그리고 크리스타 루드비히야말로 카라얀의 후반기 연주 이력에서 가장 아끼던 메조 소프라노였다. 사실 그녀도 카라얀이 지휘한 58년 <돈카를로>의 에볼리 역으로 세계적 스타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76세 카라얀, 마지막 예술혼 불태운 빈 필과 세 번째 <레퀴엠>

 

마지막 녹음은 1984년 빈 필 버전이다. 카라얀은 이 공연 후 5년도 안되어 세상을 떠났다. 

 

 

80년대 중반에 들면서 베를린 필과 카라얀의 갈등과 불화는 극에 달했다. 종신지휘자라는 타이틀은 있었지만 사실상 베를린 필을 떠난 카라얀이 오히려 마지막 예술혼을 불 태운건 빈 필이었다. 그래서 말년에 빈 필과 녹음한 모든 연주들이 최고의 명반들이자 또 하나의 ‘백조의 노래*’이다. 그 중 으뜸이 바로 이 레퀴엠이다. (*예술가의 마지막 작품이나 최후의 승부수 등을 의미하는 관용어. 백조는 죽을 때 딱 한 번 울며 노래한다고 한다.)

 

카라얀의 평생 절친이었던 크리스챤 디올이 특별히 디자인한 인민복 스타일의 양복 안에 척추교정용 복대를 꽁꽁 둘러메고 포디엄에 선 카라얀의 모습은 한편으로 숭엄하기까지 하다. (사실 요새 지휘자들이 연미복을 안 입게 된 건 순전히 카라얀의 말기 패션에서 시작된 것이다)

 

 

여기에서는 소프라노 안나 토모와 신토우Anna Tomowa-Sintow와 메조 소프라노 아그네스 발차Agnes Baltsa가 콤비를 이룬다. 특히 2부 Recordare(기억하소서)를 꼭 들어보시라. 정말 눈부시게 처연하면서도, 아름다움의 극치를 이룬다. 안나 토모와 신토우는 군돌라 야노비츠와 함께 카라얀이 후반기에 가장 아끼던 소프라노였다. 


테너는 호세 카레라스이다. 38살의 젊은 카레라스의 전성기 금빛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는 3년 후 급성백혈병 진단을 받고 몇 년 간 투병 후 극적으로 회복되어 복귀할 수 있었는데, 그 하이라이트가 바로 그 유명한 90년 로마월드컵 기념 3테너 콘서트이다. 

 

3번에 걸쳐 달라지는 카라얀의 레퀴엄, 그리고 오마쥬 버전

 

67년(59세)-72년(64세)-84년(76세) 이렇게 세월이 흘러가면서 카라얀의 레퀴엠 해석이 어떻게 바뀌어 가는지, 얼마나 더 농숙濃熟해 가는지를 비교 감상하는 것도 큰 재미와 매력이 있다. 

 

그 다음 비교하지 않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연주는 다니엘 바렌보엠의 2012년 라 스칼라 연주이다. 이 공연은 태생부터가 앞서 언급한 카라얀 1967년 라 스칼라 버전을 오마주한 것이다. (실제로는 2013년 베르디 탄생 200주년 기념 공연물로 기획되었다) 

 

 

이게 왜 카라얀의 오마주인가? 

 

20세기를 통톨어 독일과 이태리의 최고봉인 베를린 필 상임지휘자과 라 스칼라 음악감독을 동시에 겸직한 사람은 카라얀 밖에 없었다고 이미 설명했다. 그리고 반세기가 지나 그 뒤를 잇고 있는 사람은 다름아닌 다니엘 바렌보임이다. 왜냐하면 베를린 필 보다 더 자부심이 크다는 베를린 국립가극장 및 그 전속 오케스트라인 베를린 슈타츠카펠레의 예술감독을 92년부터 작년까지 31년간 맡았고 라 스칼라 극장의 예술감독을 8년(2007-2015)동안 맡았었다. 


따라서 이 오마쥬 공연에 등장하는 4명의 가수도 21세기를 대표하는 역대급 최고 가수여야 했다. 바로, 안냐 하르테로스-엘레나 갈랑챠-요나스 카우프만-르네 파페. 더 설명이 필요없는 조합이다. 그리고 10여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이보다 더 좋은 톱 가수들을 찾기 어렵다.  

 

그렇다면 나의 최애 앨범은? 카라얀이 아니라...

 

프리츠 라이너Fritz Reiner가 지휘한 1960년 빈 필 버전이다. 앞의 카라얀 라 스칼라 연주 보다 7년 전에 녹음된 것이다.

 

 

일반인들에게 좀 생소할지 몰라도 프리츠 라이너는 헝가리 출신으로 20세기 초에 유럽에서 미국으로 넘어가 미국 음악계를 중흥시킨 대표적 지휘자이다. 피츠버그 삼포니에서 10년, 시카고 심포니에서 10년을 있으면서 양 악단을 미국 최고로 만들었다. 1888년 생이니 말러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보다 한 세대 아래인데, 어찌하였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음악적 유산을 물려받은 마지막 세대이다. 

 


뒤를 이어 프리츠 라이너의 헝가리 후배들이 20세기 중반 미국 음악계를 다 휩쓸었다. 라이너 보다 10년 아래에 유진 올만디와 조지 셀이 있고 20년 아래에 안탈 도라티와 게오르규 솔티가 있다. 

 

이 앨범의 가수 4명 중 압권은 테너를 맡은 유시 비욜링이다. 스웨덴 태생의 유시 비욜링은 정말 벨벳 같은 윤기있는 귀족적 음색과 미성을 자랑하는 1950년대 최고의 테너였으나 49세에 요절했다. 이 음반은 그가 죽기 3개월 전에 녹음한 사실상 그의 마지막 레코딩이다. 과거의 젊은 패기는 사그라졌지만 곰삭은 감정표현이 최고이다.

 

 

베르디 레퀴엠에서 단 한 곡만 고르라면 그 원픽은 2부 9곡 Lacrimosa(눈물의 날)이 될 것이다. 4명의 독창자가 다 함께 부르는 절창 중 절창이다. 

이 프리츠 라이너 음반은 DECCA 레전드 시리즈로 리마스터링되어 2000년에 CD로 다시 나와 있다. 꼭 한장 소장하시길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