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승일 작가 |
경이로운 우리 시대의 가객(歌客), 김민기 선생님께서 영면하셨다. 나는 어제 부고를 듣고 거의 하루 종일 아무 일도 하지 못한 채 유튜브를 띄워 놓고 그의 노래만 반복적으로 들었다. SNS의 추모 열기도 그 어느 때보다도 뜨겁다. 아마 그의 노래에 대한 경험과 감동 지점이 그만큼 폭이 넓다는 의미일 것이다.
내게 김민기 선생님은 같은 미술대학 선배님이지만 실제로 뵌 적은 없다. 그는 미대생이었으나 노래를 만들었고, 대학생이었으나 노동자·농민이 되어 그 안에서 예술을 했다. 그는 1집 음반을 만든 싱어송라이터였으나, 공연 기획자로 변신하여 <학전>이라는 위대한 역사를 만들었다.
그는 수많은 예술인들을 양성했지만, 스스로는 무대 뒤의 ‘뒷것’이 되었다. 그는 이유도 모른 채 보안사에 끌려가 고문을 당했다. 노래를 잘 만든다는 죄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고문하는 그들을 걱정했다고 한다. 나 때문에 죄를 짓고 있구나... 하면서.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나는 국가폭력에 대들고 싸우고 있지만, 그분은 자신의 상처로 새겨 넣으신듯 하다.
나는 전두환 군사독재 시절인 1981년에 고등학교에 입학했는데, 나같이 ‘엉뚱한 녀석’들과 ‘삐딱한 외톨이’들이 잔뜩 모여 있는 미술부에서는 항상 ‘아침이슬’을 불렀다. 김민기 선생님이 어떤 생각으로 만든 노래인지와 상관 없이, “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하는 가사말은 ‘삐딱한 외톨이’들의 거칠고 고단한 고교생활을 버티게 해준 실낱같은 희망이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이 되어준 노래를 만든 그의 인생, 그의 노래는 강한 것이 아니라 아주 약한 것이었다. 그의 예술은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논리를 벗어난 감성적이고 서정적인 것이었다. 김민기의 예술은 자본주의가 감히 무너뜨릴 수 없었던, 자본주의 정반대의 것이었다. 그의 예술이 '계급성'을 초월해 그토록 아름다울 수 있었던 이유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노래로 너무 행복했다. 우리는 그에게 감사해야 한다. 그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
한국 현대예술에서 김민기만큼 독창적이고 확장적인 창작 활동을 한 예술가를 찾아보기 힘들다. 그는 시스템의 유혹을 거부하고 가장 자신의 몸에 맞는 예술을 탐구했으며, 예술가들의 공동체까지 만들었다. 스스로 항상 ‘쟁이’라고 얘기했던 그는 예술가는 자신의 죽음이 올 때까지 자신의 예술을 만들 뿐이라는 것을 온전하게 보여주었다.
그는 자신이 갖고 있던걸 버리는 것에 크게 마음의 부담이 없었던 분 같다. 그렇게 가지고 있던 걸 버리고 예술 세계를 확장하면서 변신했다. 이 모든 것은 AI가 아무리 발전해도 넘볼 수 없는 그만의 생각과 감성에서 나오는 것이다. 따라서 나에게 김민기는 저항의 상징이라기보다는, 잠자는 시간 빼고 항상 작품 생각만 했던 '진짜' 예술인이다.
그런 점에서 그는 대한민국의 위대한 예술가로 기억되어야 한다. 지금 SNS에서 보여주는 엄청난 창의적 서사적 추모가 그 시작인 듯 하다. 뒷것이 많아지면 뒷것 예술의 세상도 오지 않겠나.
김민기 선생님!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음악을 만들어주셔서 깊이 감사드립니다.
당신의 말을 마음에 새기고 끝내 이기겠습니다.
“계산적으로 살지 말고 느끼는 세상을 살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