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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천리 음악회와 마을잔치] 잣나무 숲은 노래했다, 살아남은 것들의 서러운 축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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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의 싸움, 절망의 땅 위에 세워진 단 하루의 축제
이 땅의 모든 쫓겨나는 이들을 위하여
예술은 어떻게 서로의 용기가 되었나
다시는 우리처럼 살지 않을 다음 세대를 향한 약속의 노래

황경하 기획자 | 그날, 풍천리로 향하는 길은 미약하나마 빚을 갚으러 가는 순례의 길과도 같았다. 세 시간여를 달려 아스팔트의 열기가 잦아들고 차창 밖으로 푸른 산세가 깊어질수록, 나는 세상의 소음에서 멀어져 가장 아름다운 땅의 가장 아픈 신음 속으로 들어가고 있음을 직감했다.

 

마침내 도착한 풍천리 마을회관 앞은, 7년간의 싸움으로 지쳤을 것이라는 예상과는 너무나도 다른 풍경이었다. 한여름의 태양은 아스팔트 위에서 가혹할 만큼 이글거렸다. 하지만 그 열기를 비웃기라도 하듯, 마을을 병풍처럼 둘러싼 산의 깊은 숨결이 서늘한 바람을 실어왔고, 회관 곁을 지켜온 풍성한 나무들이 만들어준 작은 그늘은 그 어떤 지붕보다 더없이 소중했다. 그리고 그 아래, 저 너머에 펼쳐진 거대한 잣나무 숲의 운명을 자신의 운명처럼 짊어진 이들이 이미 수없이 모여 있었다.

 

콘크리트 거인 아래, 생명의 숲이 울고 있다

 

이 축제는 왜 열려야만 했을까. 이들은 왜 노래를 불러야만 했을까. 그 답은 마을을 휘감고 있는 거대한 그림자에 있었다. 2019년, 한국수력원자력은 이곳 풍천리에 1조 5천억 원 규모의 양수발전소 건설을 예고했다. 상부댐과 하부댐, 두 개의 거대한 콘크리트 거인이 들어서면, 51가구가 수십 년간 일궈온 삶의 터전은 통째로 물에 잠긴다.

 

사라지는 것은 집만이 아니다. 이곳은 대한민국 잣 생산량의 70%를 책임지는, 국내 유일의 잣나무 자연림이 보존된 생명의 보고다. 주민들에게 잣나무는 단순한 생계 수단을 넘어, 자식처럼 돌보며 대를 이어온 삶 그 자체였다. 또한 이곳은 천연기념물 산양과 멸종위기 1급 수달이 뛰노는 서식지이며, 맑은 홍천강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발전소가 들어선다는 것은, 이 모든 생명의 역사가 지도 위에서 지워진다는 의미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이 모든 희생으로 만들어낼 전기는 단 1와트도 홍천 주민들을 위해 쓰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모든 전력은 서울과 수도권의 불을 밝히기 위해 송전된다. 힘없는 농촌의 삶과 자연을 제물로 바쳐, 거대 도시의 편리를 유지하겠다는 이 명백한 ‘에너지 부정의’ 앞에서, 주민들은 7년간 외로운 싸움을 이어왔다. 수차례의 강제 철거와 연행의 아픔 속에서도 그들이 외치는 것은 단 하나, “우리는 그저 살던 대로 살고 싶습니다”라는 소박한 절규였다. 이날의 축제는 바로 그 절규가 터져 나와 만든, 서럽고도 아름다운 응답이었다.

 

음악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그러나 축제는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마을 어머님들이 커다란 솥 여러 개를 걸고 땀 흘리며 밥을 짓고 나물을 무치고 계셨다. 이내 고소한 참기름 냄새와 함께, 그릇에 담긴 채소비빔밥이 사람들에게 전해졌다. 전국 각지에서 모여들어 아직은 서먹한 얼굴들이, 밥 한 그릇을 앞에 두고 비로소 서로를 마주 보았다. 숟가락을 부딪치며, 더 맛있어 보이는 반찬을 권하며, 우리는 하나의 밥상을 이루었다. 투쟁은 구호나 깃발이 아니라, 이렇듯 서로의 끼니를 챙기고 안위를 묻는 가장 원초적인 행위에서 시작되곤 한다. 그 따뜻한 밥 한 그릇의 온기 위에서, 비로소 오후의 음악은 시작될 수 있었다.

 

서로의 상처를 비추는 노래들

 

무대에 오른 예술가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이 아픔에 공명했다. 어떤 예술가들은 무대에 오르기 직전까지 자신을 가다듬으며 외부와 거리를 둔다. 그러나 축제가 시작되기 한참 전부터, 자이는 이미 풍천리 주민들과 한데 어우러져 있었다. 마을 어르신이 따라주는 소주잔을 스스럼없이 받아들고, 그들의 구수한 농담에 능글맞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호호, 경계 없는 웃음소리가 오가는 사이 그녀의 뺨은 기분 좋게 발개져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마을의 일부로 존재하던 그녀가 무대 위로 올랐을 때, 그녀는 마이크를 잡은 '가수'이기 이전에, 방금 전까지 함께 웃고 떠들던 '이웃'이었다. 그 발그레한 얼굴에는 무대의 긴장감 대신, 사람들과 나눈 온기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첫 소절을 읊조리는 순간, 그날의 축제는 완전히 새로운 차원으로 들어섰다. 삶의 희로애락과 인간 내면의 가장 깊은 심연을 건드리는 보편적인 언어가 있었다. 사람들은 구호를 외치는 대신 눈을 감았다. 발을 구르는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음악은, 투쟁의 언어로는 다 표현할 수 없었던 각자의 슬픔과 그리움, 그럼에도 불구하고 놓을 수 없는 희망들을 가만히 꺼내어 어루만져 주었다.

 

음악이 때로는 상처의 공유이자, 연대의 증언이 되곤 한다. ‘소성리 대스타’ 정진석이 무대에 섰을 때, 나는 그가 짊어지고 온 8년의 세월을 보았다. 본래 미술 작가였던 그는, 소성리에서 국가가 할머니들에게 가하는 폭력을 목격하고 그들의 이웃이 되었다. 그의 음악은 바로 그 삶의 흙먼지 속에서 태어났다. 투박하지만 흥겨운 블루스 리듬 위로, 그는 우리가 사는 이 땅의 부조리를 해학으로 꼬집었다. “싸드기지 들어왔네… 그렇게 들어선 기지 주소, 캘리포니아.” 이 기막힌 아이러니를 통해 그는 통렬하게 외쳤다. “이 땅이 니 땅이가, 이 땅이 내 땅이가! 이 땅은 니 땅 아이다, 이 땅은 우리 땅이다!” 풍천리의 싸움과 맞닿아 있는, 땅에 뿌리 내리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겪는 고통에 공감한 사람들의 박수 소리가 멎지 않았다.

 

 

 

그 바통을 이어받은 오재환의 무대는 고요했지만, 그 어떤 외침보다 무거운 파장을 남겼다. 그 역시 소성리에서 쓴 노래 ‘그래도’를 불렀다. 얼굴과 이름을 가린 채 “작은 글씨로 가득 찬 번쩍거리는 종이”를 내밀고 “이곳은 사실 나라의 땅인데 어느 나란지는 너랑 상관이 없다고” 말하는 국가 폭력의 모순된 모습을 담담히 그려냈다. 그러나 “그래도 이게 나의 땅이라고”라고 읊는 힘없는 사람들의 목소리. 이 ‘그래도’라는 세 글자에는 모든 논리를 뛰어넘어 자신의 존재 자체를 건 저항의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슬픔과 분노로만 채워질 것 같던 축제의 공기는, 모레도토요일의 무대에서 한순간 맑게 정화되었다. 제주 강정의 아픔 속에서 태어난 이 듀오의 맑고 투명한 화음은, ‘초록’이라는 노래를 통해 우리가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를 되새기는 고요한 성찰의 시간을 선사했다. "바람에 흔쾌히 파르르르 몸을 떠는 그런 용감한 사람이 되고 싶어", "언제고 어디서고 누군가의 곁이 되는 그런 넓다란 사람이 되고싶어" 라는 노랫말을 통해 그 공간에서 이미 숨 쉬고 있는 연대에 이름을 붙여주고 있었다.

 

그날 풍천리에는 주소도, 살아온 내력도 다른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서울의 아스팔트 위에서, 수원의 음반 가게에서, 멀리 성주의 들판에서 달려 온 낯선 이들이, 풍천리 주민들의 닳아버린 얼굴 곁에 앉아 있었다. 왜 왔느냐고 묻는다면, 저마다의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이유의 뿌리는 결국 하나, ‘곁이 되어주기 위함’이었다. 그날 풍천리에서 그들의 노래는, 가장 부드럽고 서정적인 목소리로 가장 강인한 저항의 이유를 증명하고 있었다. 우리 모두가 ‘초록’이 되어, 무럭무럭 자라나 이 땅을 다시 뒤덮어야 한다는, 그날의 축제가 던진 가장 아름답고도 명확한 대답이었다.

 

함께 춤추는 기쁨과 슬픔

 

그리고 마침내 축제의 심장이 터지는 순간이 왔다. 길가는밴드의 장현호가 무대에 섰다. 힘차고 신나는 포크송, ‘우리는 마침내 서로의 용기가 되어’가 시작되자, ‘용기’라는 단어는 새로운 의미를 얻었다. 그것은 먼 길을 달려와 준 이름 모를 이들의 용기, 한여름 뜨거운 솥 앞에서 땀 흘리며 밥을 짓던 어머님의 용기, 처음 보는 이들을 반갑게 맞이하고 환대하던 그 모든 작은 몸짓들이었다. 장현호의 노래는 그 모든 흩어져 있던 용기들을 하나로 모아, 거대하고 눈부신 연대의 형상으로 되돌려주었다.

 

 

장현호가 불붙인 연대의 열기를, 김동산과 블루이웃이 묵직하고 활기찬 밴드 사운드로 이어받아 폭발시켰다. 이 하루의 연대를 위해 수원에서부터 직접 드럼과 앰프 등 모든 악기를 싣고 온 그들의 헌신은, 무대가 시작되자마자 강력한 에너지로 증명되었다. 묵직한 드럼 비트와 베이스라인이 잣나무 숲의 공기를 뒤흔들었고, 그들의 록은 사람과 세상을 진동시키는 우렁찬 외침이 되었다. 쫓겨날 위기 속에서도 신념과 용기를 잃지 않았던 조옥선 사장님의 이야기를 담은 서촌 ‘통영생선구이 블루스’는, 억압에 굴하지 않는 민중의 건강한 생명력을 보여주었다. 슬픔에 주저앉기보다, 그 슬픔을 끌어안고 함께 연대하며 맞서 싸우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긴 역동적이고 힘찬 무대였다.

 

 

그리고 그는 노래 ‘물결’을 시작했다.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라는, 인류의 비극을 다루는 노래였다. 활기찬 밴드 사운드와 함께, 그의 목소리는 아득한 기억 속으로 우리를 이끌었다. “찬란한 기억 속에 그 사람들, 다들 똑같은 옷을 입고 한바탕 축제를 했지.” 개발과 경쟁에 매몰되지 않고, 서로 정겹게 어울리며, 함께 웃고 사랑하던 우리 모두가 마음 한편에 간직하고 있는 잃어버린 낙원, 대동세상의 모습.

 

그러나 그 찬란한 기억 위로, 노래는 비극의 그림자를 드리운다. “웃음이 지나가고 모닥불도 꺼지면, 회색 연기와 한숨만이, 회색 연기와 눈물만이.” 그 아름답던 축제는, 인간의 오만이 불러온 재앙 앞에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모든 것을 앗아간 회색 연기. 노래는 그 비극이 “수레바퀴처럼 반복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 구절이 힘찬 드럼 비트 위에서 울려 퍼질 때, 후쿠시마의 비극은 더 이상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개발과 성장의 이름 아래, 또 다른 ‘회색 연기’와 ‘눈물’을 예고하는 풍천리의 운명과 정확히 겹쳐졌다. 그리고 마침내 던져진 질문, “무엇이 아름다움인지를.” 김동산의 음악은 이 질문 하나를 위해 달려온 것만 같았다. 그 아름다움은 바로 눈앞의 이 잣나무 숲이고, 평화로운 마을이며, 우리가 지켜야 할 모든 것이라고, 그의 음악은 모든 소리를 다하여 외치고 있었다.

 

 

 

모든 감정이 최고조에 오른 뒤, 축제의 가장 마지막 순서가 찾아왔다. 무대에 오른 이는 삼각전파사였다. 그의 무대는 집으로 돌아가는 모두에게 던지는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그는 ‘해 뜨는 집’이라는 노래를 통해, 왜곡된 신디사이저와 파편화된 비트로 이루어진 치밀한 음향적 건축물을 쌓아 올렸다. 그것은 이 시대의 부조리를 표현하기 위한 가장 적확한 사운드였다.

 

나지막이 읊조리는 가사는 ‘기름진 영혼과 살찐 마음의 폐허’를 고발하고, “‘부유한 자들아 화 있을진저,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라며 날카로운 비판의 칼날을 세웠다. 그리고 그 노이즈의 핵심에서, 가장 처절하고 숭고한 서약이 흘러나왔다. “오 브라더, 애들에게 말해 우리처럼 살지 말라고.” 그것은 이 고통의 고리를, 이 부조리한 싸움을, 반드시 우리 세대에서 끊어내고 말겠다는 비장한 약속이었다. 그의 무대는 축제를 안일한 해피엔딩으로 봉합하지 않았다. 대신, 우리가 마주한 현실을 직시하고, 돌아간 후에도 계속 싸워야 할 이유를 모두의 가슴에 깊이 새겨 넣는, 용감하고도 장엄한 마무리였다.

 

음악은 흩어졌고 사람들은 떠났다. 어스름이 내리는 숲길을 따라 마을을 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손에, 풍천리 주민들이 잣 한 봉지와 꿀 한 병을 쥐여주셨다. 그것은 이 숲과 이 향기와 맛을 기억해달라는, 우리를 잊지 말고 이 싸움에 끝까지 함께해달라는, 무게를 가늠할 수 없는 간절한 부탁이기도 했다.

 

예술이 세상을 직접 바꿀 수는 없을지 모른다. 굴착기 한 대를 막아내지는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날 풍천리에서, 예술은 세상을 바꾸려는 사람들을 결코 혼자 두지 않았다. 서로의 상처를 확인하고, 서로의 용기가 되어주고, 마침내 함께 싸워나갈 것을 서약하게 했다. 그날의 노래들은 많은 이들의 가슴속에 남아, 앞으로 이어질 기나긴 싸움 속에서 가장 지치지 않는 힘이 되어줄 것이다. 풍천리의 잣나무 숲이 온전히 푸르를 그날까지, 우리는 그 순간들을 잊지 않을 것이다.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