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아트 전승일 작자 | 1986년 10월 28일, 전국 각 대학에서 모인 2천여 명의 대학생들은 건국대학교에서 '전국반외세반독재애국학생투쟁연합'(애학투련)을 결성하는 연합 집회를 가졌다. 당시 서슬 퍼런 전두환 독재정권에 항거하며 2천여 명이 모여 전국 조직을 결성하는 집회를 여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었다. 당시 경찰은 대학 간 연합 집회를 대부분 원천봉쇄 하였는데, 이 날 아침부터 건국대에 배치된 경찰은 검문이나 학생증 검사를 하지 않고 아무런 제지 없이 학생들을 집회장으로 들여보냈다. 학생들이 '애학투련' 결성 선언문을 낭독하고, 독재정권 화형식을 하는 순간 갑자기 대규모의 경찰 병력이 최루탄을 난사하며 학교 안으로 난입해 진압을 시작한다. 학생들은 예상치 못한 폭력 진압에 밀려 학생회관, 사회과학관, 도서관, 본관 등 5개 건물로 흩어져 들어가 건물에 고립된 채 필사의 저항을 하며 철야농성을 시작했다. 학생들의 '강요된' 농성은 추위와 배고픔 속에 3박 4일(66시간 50분) 동안 계속되었다. 마침내 경찰은 10월 31일 아침, 헬기까지 동원한 8천여 명의 병력을 투입해 전쟁을 방불케 하는 '황소 30'이라는 폭력적 진압 작전을 벌여 1천5백여 명의
전승일 작가 | 삼중수소의 공격 싱글채널 비디오 / HD / 2분 10초 삼중수소가 사람의 몸 속에 들어오게 되면 다른 방사선 핵종보다 더 치명적으로 세포에 손상을 일으키며, 체내에 남아 증식하면서 농도가 축적된다. 또한 삼중수소는 인간 유전자에도 손상을 일으켜 세대 간 영향을 미치며, 해양 생태계의 각종 어류에도 영향을 주어 생식 능력 저하 등 여러 가지 생물학적 파국을 초래한다. 본 작품은 미디어 속 이미지에 등장하는 삼중수소의 영상 그래픽 작업을 통해 그 ‘공격성’을 재시각화 했다.
전승일 작가 | '의문사진상규명에관한특별법'(제정 2000년, 폐지 2009년)에는, "의문사(疑問死)는 민주화 운동과 관련된 의문의 죽음으로서, 사인이 밝혀지지 않고, 위법한 공권력의 직접·간접적인 행사로 인해 사망하였다고 의심할 만한 상당한 사유가 있는 죽음을 말한다"라고 규정되어 있다. 즉, '의문사'는 민주화 운동과 관련해 경찰·군·국가정보원 등 국가 기관의 위법한 공권력으로 인해 사망하였다고 의심할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는 죽음을 가리킨다. 1989년 8월 15일, 전남 거문도 외딴 바닷가에서 주검으로 발견된 '이내창 의문사 사건'은 80년대 대표적인 의문사 사건이다. 당시 경찰은 "이내창이 혼자 바람을 쐬러 거문도에 내려가 유림해수욕장 해변가 암석지대에서 미끄러져 실족한 후 익사한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당시 유가족 및 중앙대 교수들과 학생 등으로 구성된 '고 이내창 학생 사인 진상규명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는 이내창(당시 예술대학 조소과 재학 중)씨가 중앙대 안성캠퍼스 총학생회장으로 바쁜 일정 중에 300km나 멀리 떨어진 거문도에 혼자서 갈 만한 특별한 이유가 없으며, 실족으로 인한 익사라고 하기에는 사체 상태와 현장 지형 등이 일치하지
전승일 작가 | 피가 눈물이 되어 눈물이 비가 되어 온 도시에 내리고 있어 나는 그 비를 맞으며 날고 있지 아주 오래전부터 이렇게 날았던거 같아 막아줄게 나의 넓은 날개로 아픈 비가 네게 닿지 않도록 막아줄께 내가 지쳐서 못날게 되더라도 걱정하지는 말아 나의 날개는 곧 다시 돋아날거야 막아줄게 나의 새로운 날개로 아픈 비가 네게 닿지 않도록 영원히 막아줄게 꼭 그렇게 할께
전승일 작가 | 1987년 1월 14일 박종철 고문살인, 4월 13일 전두환 호헌 조치 대통령 특별담화 발표 등에 분노한 재야와 민주화 진영은 5월 27일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를 결성하고, '호헌 조치 철회 및 직선제 개헌 공동쟁취 선언'을 발표한다. 그리고 민주정의당의 노태우 대통령 후보 지명 대회일 날짜에 맞춰 6·10 국민대회를 개최하기로 한다. 6월 9일, 국민대회를 하루 앞두고 이한열 최루탄 피격 사건이 벌어진다. 시민학생들은 6월 10일 오후 12시 경 명동 제일백화점 앞에서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면서 대규모 시위를 시작했고, 이날 오후 6시 성공회성당에서 열린 6·10 국민대회 이후 광범위하게 확산되면서 시위가 더욱 격렬해졌다. 명동성당 농성은 그로부터 6월 15일까지 계속되었다. 많은 학생과 시민들의 적극적인 호응을 받은 명동성당 시위는 6·10 국민대회가 6월 민주항쟁으로 이어져 불붙게 한 투쟁의 기폭제가 되었다. 그림은 당시 명동성당 앞에서 연좌시위를 하고 있는 학생들이다.
뉴스아트 전승일 작가 | <오월상생> 감독: 전승일 / 26분 14초 / 옴니버스 애니메이션 / 2007 1980년 5월, 군사반란으로 권력을 장악한 신군부는 계엄해제를 요구하는 광주 시민들을 총칼로 무자비하게 학살하는 만행을 자행한다. 민주주의를 향한 도도한 물결이 핏빛 주검으로 처참하게 압살 당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계엄군의 잔인한 살육에 맞서 죽음을 불사하고 끝까지 싸운 사람들이 있었다. 5·18 민중항쟁은 도청 최후의 진압으로 비록 패배하였지만 헌신적인 희생과 저항 정신, 나눔과 자치, 연대의 공동체 정신은 살아남아 있다. <오월상생>은 5·18의 참혹한 슬픔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투쟁의 무기가 되어 희망을 노래했던 80년대 민중가요 5곡과 함께 만남과 죽음의 이미지로 5·18의 기억과 상처를 성찰하고 복원한다. 그리고 우리들 가슴 속에 새겨야 할 한 송이 꽃과 총이 무엇인지를 되묻는다.
전승일 작가 | 친구들아! 이제 하늘로 날아가렴... 잊지 않을께! 마음 속 깊이 간직할께... 안... 녕...
전승일 작가 | 한국전쟁 발발 직후 1950년 7월 중순부터 8월 말까지 경북 경산에서 대규모 민간인 학살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국군과 경찰은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재소자들과 예비검속된 대구·경북 국민보도연맹원 등 3500여 명에 이르는 민간인들을 경산시 평산동 폐코발트 광산과 인근 대원골 등지에서 집단학살한 후 경산 코발트 광산 갱도 내부에 집단 암매장한 것이다. 경산 코발트 광산은 1930년대 일제가 태평양 전쟁에 소요되는 군사용 코발트 공급을 위해 채광을 시작한 대표적인 식민 수탈지로 2차 대전 종전 직전 폐광되어 방치되어 오다가, 1950년 대규모 민간인 학살이 벌어진 지역이다. 학살은 매우 잔혹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당시 포승줄에 묶인 채 수십 대의 군용 트럭으로 실려온 사람들은 수직 갱도 입구에 나란히 세워진 뒤 총살되거나 산 채로 수장되기도 했다. 또한, 일부는 도끼 같은 예리한 흉기로 가격당하거나 기름에 불태워지는 등 잔인하게 학살당했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2007년부터 2009년까지 3회에 걸쳐 경산 코발트 광산에서 학살 희생자 유해 발굴 사업을 하였고, 2009년 경산 코발트 광산 민간인 학살 사건에 대하여, "이
전승일 작가 | 제주 4.3 사건은 미군정기에 발생하여 대한민국 건국 이후에 이르기까지 7년 7개월 동안 지속된, 우리 현대사에서 한국전쟁 다음으로 민간인 인명 피해가 많았던 비극적인 사건이다. 1947년 3.1절 기념 제주도대회에서 경찰의 발포로 6명의 민간인이 사망하자, 이에 대해 대대적인 민·관 합동 총파업이 일어났고, 경찰의 무차별 검속과 고문치사가 잇따랐다. 이러한 경찰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독선거 · 단독정부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봉기한 이래,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군경 토벌대의 잔혹하고 무차별적인 진압 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다. 제주 4.3 평화공원은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에관한특별법>(2000년) 제정 이후, 정부 차원의 진상 조사가 실시되고, <제주4.3사건진상보고서>(2003) 채택과 함께 고 노무현 대통령의 공식 사과가 이루어지면서, 2008년에 4.3 사건으로 인한 제주도 민간인 학살과 처절한 삶을 기억하고 추념하며, 화해와 상생의 미래를 열어가기 위한 평화 · 인권 기념공원으로 건립되었다. 그리고 2
뉴스아트 전승일 기자 | 1979년 8월 9일부터 8월 11일까지 가발 및 봉제품 수출업체인 <YH 무역>의 여성 노동자 200여 명은 회사의 일방적인 폐업 조치에 항의하며 "배고파 못살겠다! 먹을 것을 달라!"는 구호를 외치며, 당시 야당인 신민당사(총재 김영삼) 건물 4층 강당에서 농성과 시위를 벌였다. 8월 11일 새벽, 경찰은 1200여 명의 병력을 건물에 투입하여 강제 진압과 해산 작전에 나섰다. 진압부대는 강제 해산 과정에서 심한 욕설과 폭언을 하면서 곤봉 등 진압장구 이외에 벽돌, 쇠파이프, 의자 등 불법적인 도구까지 사용하여 농성 중이던 YH 노조 여성 노동자, 신민당 의원 및 당직자, 그리고 취재기자들까지 무차별 구타했다. 이 진압 과정에서 한 여성 노동자가 사망했다. 당시 21세였던 그녀의 이름은 '김경숙'이다. 당시 경찰은 김경숙의 사망 경위를 "진압 작전 개시 30분 전에 스스로 동맥을 끊고, 건물 4층에서 주차장 쪽으로 투신자살하였다"고 발표했고, 언론은 이를 그대로 받아서 보도했다. 그러나 2008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조사 결과 이는 사실이 아님이 밝혀졌다. '진화위'는 "김경숙이 추락 사망한 시각은 경찰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