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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트 코스를 걷던 성악가 이경희, 길 밖에서 발견한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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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에게는 더욱 가혹한 예술 환경,
클래식 대중화보다는 클래식 매니아가 많아지길 바란다

뉴스아트 이명신 기자 |

 

아름다운 음악에 끌려 보기 시작해 표독스러운 현실에 경악하게 되는 드라마 <펜트하우스>. 성악가 이경희씨는 드라마가 보여주는 갈등과 에피소드가 과장되긴 했어도 현실을 충실히 반영했다고 한다. 성악을 전공으로 선택할 때만 해도 그렇게 치열한 세계를 살아야 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대한민국에서 전공을 선택함에 가장 중요한 것은 대학입시이다. 이경희씨는 공부를 곧잘 했기 때문에 일찌감치 전공이 정해지는 예고보다는 인문계를 택하였다. 하지만 입시 중심의 고등학교 분위기에서 3년은 결코 긴 시간이 아니다. 결국 1학년 때부터 성악 레슨을 받았고, 이화여대 성악과를 졸업한 뒤에 바로 이탈리아 산타체칠리아 국립음악원에 입학했다.

 

“이건 성악을 하는 사람에게는 당연한 코스였어요. 유학 가서 졸업할 즈음 콩쿠르에서 피날리스트 상을 받고 에이전시랑 계약하고 투어하고...” 성악의 본고장인 유럽에서는 극장장이나 연출자, 에이전시들이 각종 대회에서 유망한 성악가를 발굴하고 계약하여 월드투어 등을 하면서 커리어를 쌓을 기회를 준다.

 

그런데 이게 동양인에게는 쉬운 기회가 아니다. 판소리를 외국인이 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유럽에서 연주자를 선택함에 있어서, 1순위는 이태리, 2순위 유럽, 3순위 돈많은 미국, 4순위 공연 안한다, 그리고 마지막이 동양여자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기회를 얻기가 힘들어요.” 동양여자를 쓰느니 공연을 안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한국인은 예외라고 한다.

 

이경희씨에 의하면, 한국어는 모음이 많고 종성이 다양해서 아시아 언어권치고는 성악 발음을 하기에 유리하다. “게다가 한국인은 얼굴이 크고 목이 짧아서 구강이 넓고, 판소리 등의 음악이 대개 야외에서 진행됐기에 소리가 강해요. 여기에 공명만 얹으면 좋은 소리가 나거든요.” 이런 설명을 듣고 보니, 성악에서는 얼굴이 큰 것이 좋은 거였다!!!

 

29세 이경희씨는 파이널리스트가 되면서 밀라노 로제뚬 극장( Rosetum Milano)과 계약했다. 조수미 등 유명 성악 엘리트가 걷는 정통 코스를 그대로 따라 걸을 기회가 왔다. 그런데 그때 하필 외환위기가 왔다. 집에서 보내주는 체류비가 유럽에 도착하면 절반으로 줄었다. 불안한 마음을 더 불안하게 만든 건 보수적인 사고방식이었다. “당시에는 29세면 결혼이 지상과제였어요. 지금 생각하면 어이없지만요.”

 

 

밀라노 에이전시를 통해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기 전에 국내 공연이 잡혀 있었는데, 이경희씨는 귀국한 김에 결혼하고 바로 임신, 출산까지 내달았다. 밀라노 에이전시에서도 기다려주겠다고 했으니, 결혼과 커리어 둘 다 잡을 생각이었다. 남편도 도와주겠다고 했으니 그러면 더 좋지 않은가.

 

출산 8개월 째에 밀라노로 갔다. 정부초청장학금을 받아 베르디 국립음악원에서 포스트 디플로마 과정도 밟았다. 2년 반 동안 그렇게 유럽에서 활동하는데, 또 보수적인 사고가 발목을 잡았다. 가족들과 떨어져 아이도 시부모님께 맡겨두고 커리어에 집중하기가 힘들었다. 그는 2002년 말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바로 이듬해 모교에 출강하게 되었다. 엘리트코스를 밟던 실력자였으니 그렇게 또 잘 풀려나가리라 생각했다.

 

“음악의 중심이 실용 음악과 뮤지컬로 옮겨가고, 클래식 시장은 수요보다 공급이 많아서 자리 잡기가 굉장히 힘들더라고요. 전임교수는 하늘의 별따기고요. 저는 그래도 모교와 선화예고에도 출강하고, 입시 레슨, 음악회 기획과 진행을 하면서 연주단체도 구성할 수 있었으니 고마운 일이지요.”

 

 

그는 힐리언스라는 리조트에서 월 1회 해설이 있는 음악회를 진행하며 이를 위해 연주단체도 구성하여 이끌고 있다. 하지만 그의 활동 중심은 공연 이외에도 성악실기, 오페라 이해와 감상, 시창청음. 이태리어딕션 등의 강의다. 그래서 코로나 시기에 타격도 적은 편이었다. 반면에 그가 아는 후배들, 특히 싱글 여자 후배들은 현재도 미래도 보장되지 않는 불안정함을 못 견뎌 음악을 그만두고 취업을 하기도 하였다. 문제는 적응하지 못한다는 거다. “여자 싱글 예술가는 도피할 곳이 없어요.”

 

전임교수도 아닌, 강사 자리를 유지하려 해도 3년에 한 번 오백만~1천만 원을 들여 독창회를 해야 하고, 오페라 주역을 최소한 하나는 해야 '강사' 오디션 자격을 얻을 수 있다. 정부의 각종 정책이나 지원에서 조금이라도 불이익을 받지 않으려면 행정적으로 밝고 눈치가 빨라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많은 대다수 예술가들이 그러하듯 부업이나 아르바이트 등으로 생계를 유지해야 한다.

 

코로나 이전에는 각 기초자치단체 합창단에서 채용 기회가 많았는데, 코로나로 그마저도 줄었다. 기회가 줄어든 만큼, 무대에 설 기회가 왔을 때는 매몰차게 낚아채야 한다. 학교에서 배운 훌륭한 인성만 발휘해서는 무대를 지킬 수 없다. 이런 환경 자체가 스트레스로 작용한다. 가족이나 누군가의 지원 없이 버티는 것은 정말 어렵다. 이런 면에서 결혼과 출산이라는 숙제를 먼저 마치기로 한 그의 결정은, 멀리 가기에는 오히려 적절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팬텀싱어에 성악계에서 천재라고 하는 사람들이 나와요. 밀라노 베르디 극장에도 섰던 사람이 나오는데, 이 사람이 국내 오페라단에서 한 달 내내 오페라를 해도 오백만 원 정도 밖에 못 버는데, 방송은 기본 1천만 원에서 시작해요. 그러니 공부하다 그만두고 연예인처럼 나가는데 정말 안타깝죠.”

 

휘발성이 강한 방송에서 소비되는 천재적인 성악가들을 보면서, 이경희씨는 클래식 대중화보다는 클래식 매니아가 늘어나길 원한다. 클래식은 수백 년 동안 전해 내려온, 깊이가 다른 음악이다. 어차피 대중화되기는 어려운 장르이니 클래식이 주는 깊은 울림을 즐기는 사람들에게 더 수준 높은 감동을 주어야 클래식이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제자들에게도 엄청난 각오를 하지 않았다면 마음을 비우고 노래 외에 다른 여러 가지를 생각하라고 권한다. 현실도 고려하라는 말이다. 그래서 딸들에게도 음악을 시키지 않았다. 하지만 고3이 된 큰 딸이 기어이 음악을 하겠다고 하여 한예종에 진학했는데, 교직 이수를 조건으로 걸었다. 현실적 이유에 공감한 큰 딸은 교육대학원에 갈 예정이다.

 

 

가끔 성악의 본고장에서 좀 더 치열하게 커리어를 쌓았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랬다면 지금처럼 설거지하다가 레슨하러 가고 Q팡 주문하다가 부랴부랴 줌레슨으로 전환하는 ‘생계형 성악가’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좋아하는 노래를 계속할 수 있는 것 자체가 너무 행복해서 후회되는 것은 없다. 이경희씨는 삶의 기로에서 중요한 선택을 스스로 했고, 그 선택에 책임지며 삶을 즐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