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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형 목판화로 만나는 국토의 풍경(風景)과 산수(山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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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5월 17일(금)~ 7월 30일(토), 광주 이강하미술관

뉴스아트 김시우 기자 |

 

서울에서 동쪽 끝 강릉이나 속초까지는 불과 두어 시간, 남쪽 끝인 부산이나 목포까지는 서너 시간이면 도달할 수 있다. 축지법을 쓰듯 순식간에 오갈 수 있기에, 국토는 더이상 미지의 공간에 대한 탐험이나 호기심의 대상이지 않다.

 

이렇게 되기까지 파헤쳐지고 박제화된 이 땅을 경험하고 인식하는 방법 가운데에는 관념미를 추구하는 경치 예찬이 있다. 일본식 화풍의 '향토적 서정주의'를 차입한 풍경화나 전통적 관념의 산수화가 그것이다. 그런데, 작가의 화려한 감각으로 위장된 관념적 아름다움만 보여주는 것이 관념적 산수화의 전부일까?

 

답습되어오던 관념적 산수화 방식에 대한 반성과 성찰을 담아, ‘관념적 산수’를 실험하는 근작을 소개하는 전시가 열리고 있다. 이를 위해 무등산 작가 故 이강하의 1980년대 목판화를 단초로 다섯 명의 작가를 소환했다. 이들의 작품은 관념적 아름다움만 보여주는 것을 넘어서, 국토의 현장성과 장엄함을 담으면서도 분단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보여준다. 

 

 

故 이강하李康河(1953~2008) 화백은 광주항쟁 당시 시민군에 참가했다. 그의 무등산 그림은 이미 유명하지만 목판화는 비교적 덜 알려져 있다. 특히 그는 광주항쟁으로 옥고를 치르고 난 뒤 옥중 기억을 목판화로 형상화하였다. 이강하 미술관은 광주항쟁 42주년 기념전에 이강하 화백의 1980년대 목판화와 함께, 그와 동년배인 현역 목판화가 5명의 초대형 작품들을 선보인다.

 

비극적 현대사를 바탕에 깐 정비파의 지리산 실경으로부터 시작해서, 김준권의 수묵·채묵 목판화는 북쪽으로 연결되는 백두대간의 위용과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손기환은 백두대간으로부터 서쪽으로 흘러내리는 한강과 임진강의 유장한 역사성을 형상화한다. 그리고 이는 DMZ에서 류연복의 칼맛으로 듣는 평화의 노래, 군사분계선을 따라 한반도 허리를 횡단하는 김억의 통일 염원 풍경으로 이어진다. 

 

정비파의 초대형 작품 <신몽유-한라에서 백두, 백두에서 한라-통일대원도新夢遊 統一大願圖>는 세로 2.8m 가로 32m에 이르는 초대형 작품(2017~2021)이다. 독수리 한백이가 한라산에서 날아 올라 서해를 거쳐 지리산에 이른 뒤 설악산을 거쳐 백두대간을 따라  백두산에 다다르고 다시 한라산으로 귀환하는 여정을 형상화하였다.   

 

 

김준권은 지리산에서 동북쪽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을 소재로 한 수묵목판화 <산운山韻, 2009>과 채묵목판화 <산의 노래, 2021>를 선보인다. 4×1.6m의 대작 <산운>은 지난 2018년 제1차 남북정상회담 당시 판문점 평화의 집에서 남북정상이 사인하는 배경에 전시됨으로 유명해진 작품이다. <산의 노래>는 작가가 백두대간을 답사하면서 내면에서 일어난 사유를 미적으로 기호화 한 연작 작품이다. 

 

손기환의 <산수山水, 2017·2022>는 시공간을 단층처럼 어긋나게 재배치하고 몽타주를 시도하면서 입체적으로 자신의 주제에 다다르고자 한다. 남방한계선에서 초계근무를 설 때 잠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는 강박상태에서 본 풍경은, 그냥 '산수'일 수 없었다. 손기환은 이런 그의 그림을 ‘강박산수强迫山水’라 칭했다.

 

류연복의 <DMZ, 2010><MINE, 2010>연작은 바로 남방한계선과 북방한계선 사이 DMZ 내 실제 풍경이다.  분단현실과, 자연생태성과 죽음의 지뢰밭이 중층적으로 존재하는 공간에는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가 엄밀하게 현실적으로 상존한다. 마치 분단국가의 헤테로토피아(있을 수 없는 유토피아가  실제로 존재하는 경우)와 같다. 

 

김억은 서해 끝 백령도 두무진에서부터–강화만–조강·예성강·한강이 만나는 김포반도–중부전선인 철원 백마고지·화살머리고지·역곡천–동부 전선인 양구 두타연·해안분지 펀치볼–동쪽 끝인 고성 통일전망대(금강산 조망)에 이르는 구간을 총 8폭의 풍경으로 구획했다. 생략과 연결, 남북을 같은 공간으로 수용하려는 작가의 의도가 숨은 그림처럼 담겨 있다. 

 

 

국토의 고립을 넘어서고자 하는 작가들의 의지, 이데올로기와 분단을 넘어서려는 의지는 1980년 고립되었던 광주시민들이 목숨을 걸고 그 갇힘을 넘어서고자 했던 항쟁의 정신과 일치한다. 그리고 이들 다섯 작가 모두 광주항쟁으로부터 자신의 미학적 영향을 입고 미술적 실천을 해왔다. 

 

광주항쟁 42주년 기념으로 제시한 이들의 통일에 대한 권리이자 의무인 시각적 파르헤지아Parrhesia가 더욱 확장되었으면 좋겠다. 더불어 우리 국토의 반인 DMZ 북쪽도 이런 개성적인 목판 언어에 하루라도 빨리 담아내기를 기대한다.  - 김진하 / 미술평론, 나무아트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