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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의 바다에서 음악의 섬을 개척하다 - DIY와 Ian MacKaye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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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저의 유혹을 거부하고 40년간 독립 음악의 새 길을 개척한 이단아
워싱턴 DC 하드코어 씬에서 시작된 음악 혁명의 역사적 기록
음악의 본질을 지키기 위한 끝없는 실험과 도전의 기록

황경하 기획자 |

 

DIY, 펑크가 일으킨 변화의 시작

 

1970년대 중반 영국의 음악계는 전환점을 맞이하고 있었다. 프로그레시브 록과 디스코의 전성기 속에서, 음악은 점점 더 기술적 완성도와 화려한 프로덕션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고도로 숙련된 연주 실력과 값비싼 악기, 대형 스튜디오에서의 녹음이 필수적인 요소로 자리잡았다. 음악은 더 이상 일반 대중의 것이 아닌, 선택받은 소수의 전유물이 되어가는 듯했다.

 

이러한 흐름에 정면으로 도전장을 내민 것이 바로 펑크 록이었다. 1976년 Sex Pistols의 등장은 영국 음악계에 충격파를 몰고 왔다. 서툰 연주와 거친 사운드, 분노에 찬 목소리로 그들은 '누구나 음악을 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파했다. The Clash, The Damned 등이 뒤를 이었고, 펑크는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들 대부분은 거대 자본의 음반사들과 계약을 맺고 활동했다. Sex Pistols는 EMI와 A&M을 거쳐 Virgin Records와 계약했고, The Clash 역시 CBS Records의 품에 안겼다. 결과적으로 이들의 반항은 기존 음악 산업 시스템 내에서의 제한된 저항에 그칠 수밖에 없었다.

 

진정한 의미의 DIY(Do It Yourself) 운동은 1976년 맨체스터의 Buzzcocks가 독자적으로 제작한 'Spiral Scratch' EP를 통해 시작되었다. 자신들의 돈으로 녹음하고, 직접 제작하고, 공연장에서 판매한 이 음반은 메이저 레이블을 거치지 않고도 음악을 발표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이는 단순한 음반 발매 그 이상의 의미를 가졌다. 음악가들이 자신의 창작물에 대한 완전한 통제권을 가질 수 있다는 것, 상업적 타협 없이도 음악 활동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한 것이다.

 

미국에서는 이보다 앞선 1970년대 초반부터 사회운동의 일환으로 DIY 문화가 자리잡고 있었다.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반전운동, 여성해방운동, 환경운동 등 다양한 사회운동이 자체적으로 출판물을 만들고 배포하는 DIY 방식을 채택했다. 특히 지하출판물(underground press) 문화는 독립 음악의 토대가 되었다. 'Berkeley Barb', 'East Village Other' 등의 대안 신문들은 기존 미디어가 다루지 않는 문화적 실험들을 적극적으로 소개했다.

 

이러한 토양 위에서 미국의 펑크 씬은 영국과는 다른 방향으로 발전했다. 뉴욕의 CBGB를 중심으로 한 초기 펑크 씬은 예술적 실험성을, 로스앤젤레스의 펑크 씬은 정치적 메시지를, 그리고 워싱턴 DC의 하드코어 씬은 철저한 DIY 정신을 발전시켰다. 특히 워싱턴 DC의 펑크 씬은 처음부터 독자적인 생태계를 구축하는 데 주력했다.

 

DIY 운동은 단순히 음반 제작에 그치지 않았다. 팬진(fan magazine) 문화의 확산은 대안적 미디어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Punk', 'Slash', 'Search and Destroy' 등의 팬진들은 독립 음악 씬의 소통 창구이자 문화적 아카이브가 되었다. 독립 공연장의 설립도 활발히 이루어졌다. 기존의 상업적 공연장들이 펑크 밴드들의 공연을 꺼리자, 그들은 버려진 창고, 지하실, 차고 등을 개조해 자신들만의 공간을 만들었다.

 

워싱턴 DC의 하드코어 씬의 형성

 

1979년 2월의 추운 겨울밤, 워싱턴 DC의 조지타운 대학교에서 열린 The Cramps의 공연은 미국 하드코어 펑크의 역사를 바꾸는 전환점이 되었다. 이 공연을 본 17세의 Ian MacKaye는 음악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발견했다. 당시 워싱턴 DC는 연방정부의 도시라는 이미지가 강했고, 보수적인 정치 문화가 지배적이었다. 백인 청소년들은 특히 심각한 문화적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었다. 연방정부의 권위주의적 문화와 흑인 문화 사이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는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MacKaye와 그의 친구들이 결성한 Teen Idles는 워싱턴 DC 하드코어 씬의 시작을 알렸다. 그들은 처음부터 철저한 DIY 방식으로 밴드를 운영했다. 연습실은 부모님의 지하실이었고, 악기는 중고품을 구입했다. 공연은 직접 기획했고, 홍보물도 손으로 만들었다. 모든 수익금은 꼼꼼하게 기록하고 저축했다. 이러한 철저한 자기관리는 나중에 Dischord Records의 운영 방식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1980년, Teen Idles가 해체될 때 남은 600달러로 MacKaye와 드러머 Jeff Nelson은 Dischord Records를 설립했다. 처음에는 단순히 자신들의 음반을 발매하기 위한 수단이었지만, 곧 워싱턴 DC 지역의 다른 밴드들의 음반도 발매하기 시작했다. Dischord Records의 운영 원칙은 당시 음악 산업의 관행을 완전히 뒤집는 것이었다.

 

가장 혁신적인 것은 서면 계약을 하지 않는다는 원칙이었다. 대부분의 레이블들이 복잡한 계약으로 뮤지션들의 권리를 제한하고 있을 때, Dischord는 상호 신뢰에 기반한 관계를 추구했다. 수익 분배도 획기적이었다. 제작비를 제외한 순수익의 50%를 뮤지션에게 지급했는데, 이는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높은 비율이었다.

 

음반 가격 정책도 파격적이었다. 최소한의 마진만을 남기고 최대한 저렴하게 판매한다는 원칙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이를 위해 유통 단계를 최소화하고, 광고비를 줄이며, 포장을 간소화했다. 한정판이나 스페셜 에디션 같은 마케팅 전략도 거부했다.

 

Minor Threat와 Straight Edge

 

1980년 결성된 Minor Threat는 하드코어 펑크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빠른 템포와 강렬한 사운드는 기존 펑크 록을 한 단계 진화시켰고, 명확한 메시지를 담은 가사는 젊은이들의 공감을 얻었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이들이 제시한 새로운 대항문화의 가능성이었다.

 

1980년대 초반 미국의 청년문화는 심각한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60년대 히피 문화의 퇴색과 함께 마약과 알코올 중독이 만연했고, 폭력적인 하위문화가 확산되고 있었다. 'Sex, Drugs and Rock'n'Roll'이라는 슬로건은 이미 진부한 클리셰가 되어있었고, 많은 젊은이들이 자기파괴적인 생활 방식에 빠져들고 있었다.

 

Minor Threat의 'Straight Edge'는 이러한 상황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 약물과 알코올에 의존하지 않고도 저항이 가능하다는 것, 오히려 맑은 정신으로 더 강력한 저항이 가능하다는 메시지는 많은 청년들에게 새로운 삶의 방식을 제시했다. 이는 단순한 금주・금연 운동이 아닌, 자기 통제와 자기 존중을 통한 저항의 철학이었다.

 

Minor Threat는 공연장 문화도 바꾸어놓았다. 당시 펑크 공연장에서는 폭력 사태가 빈번했다. 스킨헤드들의 폭력, 모슬링(moshing)으로 인한 부상, 성추행 등이 만연했다. Minor Threat는 이러한 폭력을 단호히 거부했다. 공연 중 폭력이 발생하면 즉시 연주를 중단하고 상황을 해결했다.

 

 

Fugazi의 새로운 시도

 

1987년 결성된 Fugazi는 MacKaye의 실험적 시도가 정점에 달한 프로젝트였다. Minor Threat의 해체 이후 MacKaye는 Embrace를 통해 이미 하드코어의 음악적 한계를 넘어서려 했지만, Fugazi에서 그 실험은 완전히 새로운 차원으로 나아갔다. Guy Picciotto, Joe Lally, Brendan Canty와 함께한 이 밴드는 포스트-하드코어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다.

 

음악적 혁신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Fugazi가 보여준 운영 방식이었다. 이들은 공연 입장료를 5달러로 제한했다. 당시 대부분의 록 공연 티켓이 20-30달러를 호가했던 것을 감안하면 파격적인 가격이었다. 이는 단순한 가격 정책이 아닌, 음악의 접근성에 대한 철학적 선언이었다. 음악은 누구나 즐길 수 있어야 한다는 신념의 실천이었다.

 

공연장 선정에서도 혁신적인 시도가 이어졌다. 알코올 판매를 주 수입원으로 하는 일반적인 공연장 대신, 커뮤니티 센터, 교회, 도서관, 미술관 등 대안적 공간을 활용했다. 이는 공연이 단순한 유흥이 아닌 문화적 교류의 장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비롯됐다. 특히 전 연령이 참여할 수 있는 공간을 고집했는데, 이는 청소년들의 문화적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Fugazi는 관객과의 관계도 재정의했다. 공연장의 바리케이드를 없애고 관객과 직접 소통했다. 폭력적인 행동을 하는 관객에게는 입장료를 환불해주고 퇴장시키는 파격적인 정책을 실행했다. 이는 공연장이 모두에게 안전한 공간이 되어야 한다는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특히 여성 관객들이 안전하게 공연을 즐길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데 주력했다.

 

15년의 활동 기간 동안 Fugazi는 전 세계에서 1000회가 넘는 공연을 했다. 그들의 앨범은 수십만 장이 팔렸고, 'Repeater'와 같은 앨범은 50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했다. 이는 메이저 레이블의 지원이나 상업적 타협 없이도 성공적인 음악 활동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한 사례였다. 그들은 광고를 하지 않았고, MTV에 뮤직비디오를 내보내지도 않았다. 순전히 입소문과 DIY 네트워크를 통해 이러한 성과를 이룬 것이다.

 

에이전트 시스템에 대한 도전

 

MacKaye가 가장 강력하게 비판한 것 중 하나는 현대 음악 산업의 공연 시스템이었다. 1980년대부터 점차 체계화된 클럽 공연 시스템은 새로운 음악가들의 진입을 가로막는 장벽이 되어가고 있었다. 밴드가 공연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에이전트를 통해야 했고, 에이전트들은 자신들이 관리하는 밴드들을 서로 경쟁시키며 협상을 벌였다. "이 밴드를 안 쓰면 저 밴드도 못 쓴다"는 식의 협상은 공연장과 에이전트들 사이의 권력 게임이 되어갔다.

 

이러한 시스템은 결과적으로 음악의 다양성을 해치고 새로운 밴드들의 성장을 저해했다. MacKaye는 "사다리는 점점 더 높아지고, 사다리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누군가를 고용해야만 하는 상황"이라고 비판했다. 이는 DIY 정신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다.

 

MacKaye가 제시한 대안은 놀라울 정도로 단순했다. "로젠데일 커뮤니티 센터에서 공연하고 싶으냐고? 그냥 방 하나를 빌리면 된다." 그는 The Evens를 통해 이러한 대안적 공연 방식을 실천했다. 도서관, 교회, 미술관, 커뮤니티 센터, 집회 현장 등 비전통적 공간에서의 공연은 음악이 특정 시스템에 종속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시도는 실험을 넘어 하나의 운동이 되었다. 공연장은 더 이상 술을 파는 바나 기업의 후원을 받는 대형 공연장만을 의미하지 않게 되었다. 음악은 어디에나 존재할 수 있다는 MacKaye의 철학은 많은 독립 뮤지션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씬에 새로운 형태의 공연 문화를 만들어냈다.

 

"클럽 시스템은 많은 면에서 음악의 적이 되어가고 있다"는 그의 말은 단순한 비판이 아닌, 대안적 가능성에 대한 선언이었다. 누구나 음악을 할 수 있고, 어디서든 공연할 수 있다는 단순한 진리를 회복하는 것, 그것이 바로 MacKaye가 추구한 DIY 정신이었다.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도전

 

2000년대 들어 음악 산업은 근본적인 변화를 맞이했다. mp3의 등장으로 음악의 물리적 형태는 사라지기 시작했고, 스트리밍 서비스의 등장으로 음악 소비 방식도 완전히 달라졌다. 많은 독립 레이블들이 이러한 변화의 파고를 견디지 못하고 문을 닫거나 메이저에 흡수되었다.

 

하지만 Dischord Records는 이러한 변화 속에서도 자신들의 원칙을 지켜나갔다. 디지털화는 받아들이되, 그것이 음악의 본질적 가치를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 이루어졌다. 수천 개에 달하는 공연 테이프를 디지털화하는 작업을 진행했고, 이를 온라인으로 제공했다. 특히 Fugazi의 공연 아카이브는 역사적 가치를 지닌 문화유산으로 평가받고 있다.

 

새로운 세대와의 소통도 계속되고 있다. MacKaye는 젊은 뮤지션들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DIY 워크숍을 통해 독립 음악의 노하우를 전수하고 있다. The Evens를 통해서는 새로운 형태의 공연 문화를 실험하고 있다. 도서관, 미술관, 커뮤니티 센터 등에서의 소규모 공연은 음악이 일상의 한 부분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현대 음악 산업의 위기와 DIY 정신의 의미

 

현대 음악 산업이 직면한 가장 큰 문제는 음악이 '콘텐츠'로 전락했다는 점이다. 스트리밍 시대의 도래와 함께 음악은 끝없이 소비되는 디지털 상품이 되었다. 스포티파이나 애플 뮤직 같은 스트리밍 서비스들은 음악의 예술적 가치보다는 재생 수와 구독자 수에만 집중한다. 알고리즘이 추천하는 음악들은 점점 더 획일화되어가고, 실험적이고 도전적인 음악들은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라이브 음악 씬도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다. 대형 공연장들은 티켓 가격을 끊임없이 올리고 있고, 소규모 공연장들은 생존을 위해 알코올 판매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록 페스티벌은 기업의 마케팅 장으로 변질되었고, 독립적인 활동을 펼치는 뮤지션들의 설 자리는 점점 좁아지고 있다.

 

더욱 우려스러운 것은 음악 교육의 현실이다. 공교육에서 음악 교육은 점점 더 주변화되고 있고, 사교육은 지나치게 고가화되어 있다. 결과적으로 음악은 다시 한번 특권층의 전유물이 되어가는 듯하다. 이는 1970년대 펑크가 등장했을 때의 상황과 묘하게 닮아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MacKaye와 Dischord Records가 40년 넘게 지켜온 DIY 정신은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들은 음악이 상품이 아닌 문화적 자산이라는 것, 예술가와 관객이 직접 소통할 수 있다는 것, 상업적 성공과 예술적 진정성이 양립할 수 있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었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그들의 실천이 그저 이상주의가 아니라는 점이다. Dischord Records는 40년 이상 흑자 운영을 이어왔고, Fugazi는 수십만 장의 음반을 판매했다. 이는 상업적 타협 없이도 지속가능한 음악 생태계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들의 성공은 대안적 음악 문화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살아있는 증거다.

 

새로운 시대, 새로운 도전

 

현재 MacKaye는 The Evens를 통해 새로운 실험을 이어가고 있다. 아내 Amy Farina와 함께하는 이 프로젝트는 기존의 록 음악 문법을 완전히 벗어난다. 전통적인 공연장 대신 도서관, 미술관, 커뮤니티 센터 등에서 공연을 하고, 관객과의 직접적인 대화를 통해 음악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한다.

 

Dischord Records도 변화하는 시대에 맞춰 진화하고 있다. 디지털 아카이브 구축을 통해 과거의 음악들을 보존하고, 새로운 세대들에게 전달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특히 Fugazi의 공연 아카이브는 20세기 말 미국 독립 음악의 역사적 기록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젊은 세대와의 연대도 계속되고 있다. MacKaye는 정기적으로 워크숍과 강연을 통해 DIY 정신을 전파하고, 젊은 뮤지션들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특히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들에게 아날로그 시대의 DIY 정신이 어떻게 현대에 적용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데 주력하고 있다.

 

DIY 정신의 미래

 

MacKaye와 Dischord Records의 여정은 음악의 본질적 가치를 지키기 위한 끊임없는 투쟁의 기록이며, 대안적 문화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이정표다. 상업화의 거센 물결 속에서도, 그들이 지켜온 원칙과 실천은 새로운 세대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도전 속에서도, DIY 정신은 여전히 유효하다. 오히려 기술의 발전으로 독립적인 음악 제작과 유통이 더욱 용이해진 현재, DIY의 가능성은 더욱 확장되고 있다. MacKaye가 보여준 길은 이제 전 세계의 수많은 독립 뮤지션들에 의해 다양한 방식으로 재해석되고 있다.

 

"음악은 산업이 생기기 훨씬 전부터 존재했고, 인간의 언어보다도 오래된 소통의 형태"라는 MacKaye의 말은 오늘날 더욱 절실한 의미를 갖는다. 음악의 본질을 지키면서도 지속가능한 생태계를 만들어가는 것, 그것이 바로 현대의 DIY 정신이 나아가야 할 방향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