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군상 1~4로 묻혀버린 이쾌대의 서사 대작

URL복사

최석태 작가 | 

 

1948년 11월, 이쾌대는 조선미술문화협회의 제3회 정기전에 야심적인 크기의 그림을 발표한다. 150호 크기는 높이가 170센티를 좀 넘고, 가로는 2미터가 넘는 크기다. 그림의 제목은 <조난(遭難)>이다. 이 그림이 그려지고, 발표된 때는 1945년 8월에 광복이 된 때로부터 3년이 다 되어가는 시점이다. 잘 알다시피 남과 북에는 따로 각기의 정부가 세워진 때다.

 

그림을 본 사람들은 다투어 한마디씩 했다. 그만큼 문제작이었다. 크기도 크기지만, 담긴 내용과 화법이 남달랐다.

 

화가 박고석은 “문제작”이라 했고, 해방공간에서 이쾌대의 처신을 격렬히 비난해 오던 비평가 박문원은 “독자적인 경지를 이루고 있으며 또 벽화나 대작을 꾸미기에 우선 적당한 하나의 양식을 창조한 사람”, “인민미술에 대한 열정은 (그가 속한 조선미술문화협회 회원 중에서) 오직 이쾌대씨에게서만 느낄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리얼리즘이 있지 않다는 점에서는 아쉬움을 표했다.

 

화가 겸 미술문필가 김용준은 “그 기법이 현대적인 사실이 아니요, 16, 7세기적인 사실의 인상을 주는 위험성이 있었다.”고 했고, 문학평론가 김동석은 이쾌대의 <조난> 이전에 발표된 <해방고지>를 겨냥한 듯, 이쾌대의의 작품 방향에 대하여 “라파엘의 인물에다 조선옷을 입혀놓은 것 같았다.”라고 평했다.

 

이 그림은 우리 역사 중에서도 가까운 100년 동안에 이룩된 시각예술 작업 중에서 가장 문제를 품은 작품이다. 복잡하고 착잡한 정세 속에서 그려져 제출되어 커다란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친형 이여성이, 암살당한 여운형의 오른팔이었다는 점에서 이쾌대는 신분상 위협을 느껴야 했다. 그의 부인이 그림을 잘 간직했으나 그 후 오랫동안 작품의 존재조차 발설하기 힘들었다.

 

이처럼 화제가 되었다가 50여년 동안 사라졌던 이쾌대의 문제작 <조난>은 어디로 갔을까? 현재 유족이 소장하고 있는 이 그림은 과연 그 <조난>일까?

 

이쾌대가 그린 일련의 대작 그림은 총 4점으로, 모두 ‘군상’이라는 애매한 이름으로 부른다. 필자는 그중 아래 2점은 ‘해방고지’라고 생각한다. 공중을 날듯 하는 두 여인이 숨어서 무엇인가를 알리는 역할을 하는 설정으로 그려졌기 때문이다.

 

 

 

나머지 2점은 ‘조난’이다. 아래 그림을 보면, 양상은 다르지만 두 그림에 모두 폭발이 그려졌다. 특히 앞의 그림은 폭발이 거대하여 사람들의 움직임과 조응하면서 화면 전체를 지배하는 것이 특징이다. 후자는 전자의 상태를 발전시킨 것임이 분명하다. 그런 점은 앞의 해방고지 연작에서도 마찬가지로 드러나는 특징이다.

 

 

 

문제의 이 그림은 자세한 내용이 아직 제대로 해명되지 않은 상태에서도 여러 논자들에 의해 1945년의 광복부터 대체로 한국전쟁이 발생한 시기를 가리키는 이른바 해방공간의 시대상을 반영한 최대의 문제작으로 꼽힌다.

 

1,000쪽에 이르는 막대한 분량의 저서『독도 1947:전후 독도문제와 한·미·일 관계』(돌베개, 2010)에서 이 그림을 거론한 한국현대사 연구자 정병준 이화대학 사학과 교수는 이 그림이 바로 그 <조난>이라고 보았다.

 

그가 이렇게 추정하는 까닭은 명확하지 않다. 하지만 이 그림이 <조난>이 아니라고 보는 여러 견해도 뚜렷한 근거를 제시하지는 못하고 있다. 결정적인 증거가 제시되지 않는 한 이런 사정은 바뀌기 힘든 것으로 보인다. 관련 글들을 모두 검토한 결과 필자는 여러 정황상 이 그림이 1948년 조선문화예술협회 3회 정기전에 출품된 바로 그 <조난>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조난>으로 추정되는 이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자.

 

그림은 폭발로 보이는 사건 혹은 사고에서 비롯된 사태임이 분명하다. 폭발의 위치를 시계에 빗대자면 12시. 한밤중에 폭발이 일어났고, 그 폭발 때문에 놀란 사람, 폭발은 모르는지 아는지 화내는 사람이 보인다.

 

 

화면의 오른쪽 사람들은 화면 안쪽 멀리서부터 보는 사람의 눈앞으로 쏟아져 나오듯 쓰러지거나 놀라거나 한다. 그 뒤로는 바위를 들어 내리찍으려는 사람과 이를 말리려는 사람이 화면 맨 안쪽에 보이고, 놀라움을 가라앉히려는 남녀를 비롯하여 놀라서 넘어지는 여자 그리고 머리를 잡거나 물어뜯는 사람으로 이런 놀라운 광경을 보고 놀라는 여자도 보인다. 맨 오른쪽에는 화면을 나누는 듯한 배경을 설정하고 아이를 거느린 여자가 무기력한 상태를 보인다.

 

 

그림 왼쪽의 인물들도 몇 개의 무리로 나눌 수 있다. 화면 맨 안쪽에 폭발에 놀란 듯한 여러 사람이 보인다. 오른쪽에서 벌어진 비극적인 상태를 피해 달아나려는 사람도 보인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사람은 다쳐서 정신을 잃은 듯 보이는 여자를 부축하고 안전한 곳을 찾으려는 남자들이다. 그들의 왼쪽에는 아이들 여럿이 포함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왼쪽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이 사람들은 폭발로 인해 다친 사람을 옮기거나, 안전한 곳을 찾아 떠나는 듯하다.

 

이쾌대의 작품 <조난>이 발표된 시기는 그해 6월 미군에 의한 독도 폭격 사건이 일어난 직후이다. 그래서 당시 박고석은 이 작품을 보고 “독도사건의 약소민족의 비애를 민족적인 충동에서 관심한” 작품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쾌대는 독도사건을 소재로 르포타쥬나 현실고발을 하지 않았다. 독도 사건은 바다를 배경으로 한 것이지만 화면의 어디에도 바다나 배 같은 소도구는 보이지 않는다. 그는 그림에서의 사태를 어디에선가 벌어진 일로 연출하였다. 직접 사건을 그려서 즉자적으로 알게 하면 당시의 시대 상황상, 반발을 부를 수도 있다고 여겼던 것이 아닐까?

 

이쾌대는 이 사건이 일어난 배경에 관심을 두고 암시 내지는 은유하고자 하였다. 그는 이 사건을 계기로 우리가 어떤 상태에 놓여있으며,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를 고민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쾌대가 만든 정황은 육지에서 어떤 폭발로 혼란이 일어나지만, 젊은이들과 어린이들이 이를 해결할 것이라는 듯이 말한다. 이 그림 전체를 관통하는 이야기는 정체 모를 어떤 폭발에 죽거나 다치거나 놀란 사람들이 정신을 차리고 안전한 곳으로 가려고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작품은 현실의 고발, 르포르타주가 아니라 명백히 일종의 은유에 해당하는 그림이다. 낭만주의 시대 대표화가 제리코가 당시 일어난 사건을 소재로 <메두사호의 뗏목>을 그려 참상을 전한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하는 견해는 재고되어야 한다. 들라크르와의 대표작 <자유의 여신>과 견주는 견해 또한, 화풍은 유사하나 작의는 다른 것이라는 점에서 재고해야 한다.

 

 

그보다는 오히려, 제리코나 들라크르와 보다 훨씬 더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렘브란트의 <야경꾼들>에 나타나는 방향성과 연관해보거나, 폴 고갱이 그의 만년작이자 전지구적이라 할 순례를 거쳐 이룬 작품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우리는 무엇이며, 어디로 가는가?> (1897년, 천에 유채, 375x139센티미터, 보스턴 미술관 소장)에 견주는 편이 낫다.

 

이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조난>은 우리에게 질문하고 있다고 본다.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