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평론가 최석태 |
그림 한가운데에는 불이 켜진 초가 그려져 있다. 게가 초를 잡으려 하고 그 주위로 아이로 보이는 세 사람이 팔을 뻗쳐 초를 받치려 하는 것 같다. 초 위쪽으로는 한 남자가 눈을 감고 누워 있다. 한 손에 둥글게 말린 종이를 쥐고 있다. 이로써 누군가를 추모하는 그림의 분위기가 잡혔다.
종이를 말아쥐고 누운 사람의 발치와 머리 근처로 세로줄이 거듭 그어져 있다. 발치의 세로줄을 따라 아래로 가보면 모서리를 만들면서 가로줄과 만난다. 이 세로줄과 가로줄은 경계를 나타내는 걸까? 그러고 보니 촛불이 그려진 장면은 그림이다. 그림임을 알고 보니 직사각형의 선명한 화폭도 눈에 들어온다.
화폭 아래 왼편에는 물감판과 붓이 보인다. 오른편에는 고개를 젖힌 얼굴이 보인다. 화폭의 그림과 약간 겹쳐지긴 했어도, 그가 팔을 뻗어 붓을 쥔 손도 보이다. 누군가의 죽음을 추모하는 그림을 그리고 있는 화가를 그린 것이다.
이 그림은 이중섭이 화가답게 친구인 시인 오장환의 죽음을 추모하여 그린 그림이다. 이 사실은 꽤 오래 전에 많은 사람들이 귀뜸해주었지만 그 당시에는 명확하게 인지하지 못했고, 시인의 이름 석자만 아는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오장환 시인은 이른바 월북자로 기피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전혀 몰랐다시피 하던 시인을, 서울 올림픽 개최 시기 이른바 해금이 된 즈음에서야 어느 정도 알게 되었다. 해금 직후 처음으로 나온 오장환 전집의 거죽에 이중섭의 그림이 실렸다. 오장환이 광복 후 출간한 시모음의 속지에 그렸던 그림이라고 한다. 당시 속그림은 아무에게나 그려주지 않았기에 두 사람 관계가 더 궁금했다. 그 뒤로 연구서나 박사논문도 나와서 시인과 이중섭의 작품에 조금 더 가까와질 수 있었다.
김광균 시인은 어떤 글에서, 광복 직후 서울대병원에 입원한 오장환을 문병하러 갔다가 같은 이유로 찾아온 이중섭을 처음 만났다고 회고하였다. 이중섭과 오장환의 교유는 그 이전부터였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오장환이 1939년에 발표한 작품과 이중섭이 1941년 4월 24일에 그린 두 마리 사슴 사이에 연관성이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이 시와 그림은 추후에 다시 다룰 것이다.)
하지만 그 외에는 이중섭의 엽서 그림과 오장환의 시 사이에서, 자료에서 보거나 사람들로부터 들은 이야기들만큼 깊은 관련이 있다는 느낌을 받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이중섭의 엽서그림이 서정주의 초기시와 겹쳐지는 느낌이 강하게 들어 서정주 시인에게 연락했다가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다.
1941년, 서정주의 첫 시집 <화사집>을 오장환이 비용을 전액 부담하여 출판하였다는 것이다. 표지는 일일이 자수를 놓은 천으로 호화롭게 만들어 한정판으로 펴냈다. 오장환이 이 한정판 시집 한 권을 이중섭에게 준 것으로 보인다. 그 직후 둘이 처음 만난 자리에서 서정주는 이중섭이 자신의 시 세 수를 외워 보여서 너무 놀랐다는 것이다.
이중섭이 시에 대한 조예가 놀랄 정도로 깊다는 것은, 이런 저런 이야기나 자료를 통해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막 등단한 시인의 갓 출간된 첫 시집에 실린 시를 한 수도 아니고 세 수나 외워 읊다니! 중섭에 대한 말이 부풀려지거나 그냥 나온 것이 아님을 절감하였다. 이중섭의 엽서그림은 이런 과정에서 서정주의 초기시와 느낌이 겹쳐지게 된 것이다.
서정주의 증언을 접하고, 이중섭 그림이 시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이 엽서그림이 오장환을 추모하여 그린 것이라는 말도 그제야 제대로 이해가 되었다. 시집의 속그림을 그려주었고,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 북으로 간 오장환을 만나러 가기까지 했다. 그가 심하게 좌경했다며 실망감을 드러냈던 이중섭은, 그의 부고를 듣고 매우 개탄했을 것이다.
이중섭을 더욱 안타깝게 했던 것은 오장환의 병력이다. 오장환이 병마 앞에서 어떤 심정이었는지 솔직하게 보여주는 시가 있다. 광복 전후하여 병원에 입원했을 때의 정황을 담은 시이다.
8월 15일 밤에 나는 병원에서 울었다.
너희들은 다 같은 기쁨에
내가 운 줄 알지만 그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일본 천황의 방송도,
기쁨에 넘치는 소문도,
내게는 곧이가 들리지 않었다.
나는 그저 병든 탕아로
홀어머니 앞에서 죽는 것이 부끄럽고 원통하였다.
- 병든 서울, 상아탑, 1945. 12의 첫 연
1947년 연말에 임화와 함께 북으로 도망친 오장환은 다시 지병인 심장병이 도져 1948년 말에서 이듬해 여름까지 소비에트 러시아에 가서 지냈다. 이 경험으로 그는 '쏘련기행시집'이라는 부제를 단 <붉은 기>라는 시모음을 내기도 했다. 그러나 또 병이 재발, 한국전쟁 중에 다시 소비에트 러시아로 가서 수술을 받다가 사망했다고 한다. 1951년 6월이었다. 이중섭보다 2년 늦게 세상에 나와 5년 먼저 세상을 떠난 것이었다.
저마다 기쁜 마음, 싱싱한 얼골로
오래니 있었던 병실에서
나가는 사람들,
그러는 동안에
해방을 기약하는 그날이 왔고,
그 뒤에도 잇대어 여러 가지 병든 사람이나
흥분된 감격에 다쳐 온 젊은이
새로이 새로이 왔다는
모두 다 씩씩한 얼골로 나간다.
아 억압이 풀려진 세상은 어떠하련가,
나 역시 나가게 되리라 믿고
또 나가고 싶은 마음에
-그러면 하로 바삐 쾌차하시오, 우리도 손목 잡고 일합시다.
하고,
먼저 나가는 이들 당부를 뼈에 새긴다.
(3, 4연 생략)
병든 몸이여!
병든 마음이여!
이런 것이 무어냐
어둔 밤의 횃불과 같이, 나의 싸우려는
싸워서 이기려는 마음만이
지금도 나의 삶을 지킨다.
- 입원실에서, 인민평론, 1946. 3
오장환은 일제의 쇠사슬에서 풀려나 새로운 나라를 만들고 행복하게 살고자 하는 결의가 잘 드러난 시를 남기기도 했지만, 그런 희망은 병마 앞에 덧없이 스러졌다. 오장환이 머나먼 이국에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은 이중섭이 오장환의 죽음을 그린 것이 이 엽서그림이다.
이른바 은박지 그림이라고 하는 이중섭의 알미늄 박지에 그린 그림들을 잘 살펴보면, 특별한 도상들이 적지 않다. 이미 소개한 학살 관련 그림도 그렇거니와, 무언가 추모하는 느낌을 주는 그림은 이 외에도 두어 점 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