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석태 미술평론가 |
앞에서 알미늄박지에 긁어 그린 그림 가운데, 전쟁 중 저질러진 양민 학살을 고통스럽게 보여주는 그림을 이미 살펴본 바 있다. 그 그림의 화면 오른쪽에 어머니인지 아내인지 모르겠으나 큰 비중으로 그려진 여자의 얼굴이 있고, 짧고 굵은 선으로 흐르는 눈물을 표현한 것에서 나는 눈을 떼기 어려웠다. (관련기사 이중섭 <눈물>, 원통한 떼죽음을 은박지에)
이렇게 처참한 동족상잔, 골육상쟁을 그린 그림이 또 있다.
아래 그림을 보면, 두 마리의 네발 짐승이 아래위로 그려져 있다. 이들의 꼬리는 묶여 있고 짐승의 머리 부분은 사람의 상체로 설정되어 있다. 이들 사람인지 짐승인지 모를 괴물은 손에 망치와 칼을 쥐고 서로 해치려는 것으로 보여 우리를 놀라게 한다. 섬찟한 느낌이다.
이중섭은 서로 해치려는 두 마리의 짐승을 그리면서 그 꼬리가 서로 묶인 것으로 연출함으로써 이들이 처한 상황을 넌지시 보여주고 있다. 이들은 서로를 스스로 묶었는가? 누군가가 강제로 묶었는가? 이들은 왜 한 손에 서로를 해치는 흉기를 들고 휘두르고 있는가?
그런데 이렇게 서로 다른 짐승의 꼬리를 연결하는 발상을 한 그림이 또 있다. 그 그림은 이중섭이 1941년 6월 2일자 엽서에 그려 보낸 그림이다. 특이하게도 이 그림에 등장하는 세 마리 짐승들의 꼬리는 서로 연결되어 그려져 있고 여인이 그것을 손잡이처럼 들어올리고 있다.
한 방향으로 달리는 세 마리 짐승 그림이 1941년에 그려진 반면, 이번에 소개하는 서로 해치려는 두 짐승의 그림은 1950년 이후 휴전으로 전쟁이 멈춘 시기를 전후하여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그들의 꼬리는 확연하게 묶여 있다. 조금만 더 잡아당기면 풀기 어려운 옭매듭이 되어버릴 것만 같다.
시간 차를 두고 그려진 그림들에서, 이중섭은 짐승의 꼬리를 통해 무슨 말을 하고싶었던 것일까? 해방 이전에는 평화로운 통일 조국에 대하여 희망을 가졌었는데, 해방 이후 엉켜버린 정국 속에서 걱정스럽고 실망한 마음을 표현한 것일까?
원래 그림을 다시 보자. 일견 잔인해보이는 설정 이면에 중섭은 좀 더 생각하게 하는 장치를 마련했다. 칼과 망치를 들고 서로 해하려 하는 장면이지만 둘의 얼굴 표정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고민하게 한다. 그들의 얼굴 표정이 잔인한 짓을 할 때의 표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 손에 망치를 든 괴물의 다른 손은 칼 든 상대편 팔을 잡으려는 듯 뻗어있으나 표정은 마뜩찮은 듯 찌푸려져 있다. 칼을 든 괴물은 상대방의 손을 피하려는 듯하다. 쌍방이 다 곤혹스러운 표정이다.
이 그림은 소재 말고 또 다른 점도 특이하다. 한글가로풀어쓰기로 이름을 그림의 맨 위, 그것도 가운데에 적었다. 그리고는 이름의 좌우로 네모난 종이 형태에 맞추어 테를 둘렀다.
그림에 곁들인 색칠도, 위아래 짐승들의 몸통 색은 상대방이 걸쳐입은 저고리 색과 같게 칠했다. 그런데 색칠한 방법은 다르다. 저고리는 세로로 몸통은 가로로 그려진 느낌이라서, 같은 색이지만 칠이 다르도록 구성했다. 배경은 차가운 색으로 선택해 그림 전체의 어두운 분위기를 강화하고 있다.
이 그림이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무엇일까? 한마디로 말한 내용이 있다.
나라의 절반을 꺾어 한배새끼가 서로 목을 자르고 머리를 까고 세계의 모든 나라가 어울림을 해 피와 불의 회오리바람을 쳐 하늘에 댔던 그 무서운 난리
- 함석헌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사상계, 1958. 8 (임헌영, 문학의 길 역사의 광장;문학가 임헌영과의 대화, 한길사, 2021, 98쪽에서 재인용)
6. 25 전쟁이 이런 전쟁이었다고 절규하는 듯한 말이다. 함석헌의 이 말이 나오기 수년 전 어느 때에 화가인 이중섭은 이 처참한 상태를 그린 것이다.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리가 당하는 이 처참함을 세계에 내놓아 증거하고 싶다는 마음을 적어보내기도 한 이중섭이었다.
크지 않은 종이에 그려진 이 그림은, 분명 전시나 책자로 발표하기 위해 그린 것은 아닐 것이다. 자신의 속마음을 감추기만 하고싶지는 않았던 이중섭이 주위 사람에게 그려준 것으로 보인다. 필자는 이런 그림이 좋은 바탕재료 위에 비싼 물감으로 그려진 그림보다 덜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림의 제목은 필자가 붙인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분이 더 좋은 이름을 궁리해 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