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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웬 세상이야>, 이도영의 미술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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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석태 미술평론가 |

 

 

도대체 어떤 세상이 되었기에 알을 깨고 나오는 병아리를 그리고, 웬 세상이야 라고 외치며, 시원하다고 말하는 것일까? 무엇이 시원하다는 말일까?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은 이도영. 1884년에 태어나 1933년에 돌아간 화가다. 다달이 나오는 정기간행물에 이 그림을 그렸으나, 이 한 장으로 끝나버렸다. 아마 검열로 더 이어지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인쇄되어 나온 이런 그림은 그 동안 미술작품 혹은 예술작품으로 다루어지지 않았다. 지난 2019년에 열린 국립현대미술관 창립 50년 기념 전시, <광장;미술과 사회 1900-2019전>에 출품되었으니 비로소 미술작품으로 대접을 받았다고 해도 무리한 말이 아닐 것이다. 

 

1909년부터 1년 조금 넘어 이어지다가 식민지가 되어 그만 두게 된 그의 만화 작업은, 대한제국의 흔적이라는 것 만으로도 소중한데 더하여 항일 미술 활동으로 거의 독보적인 활동이라고 할 것임에도 광복 60주년 기념으로 국립현대미술관이 개최한 <한국미술 100년전>에 출품되어 처음으로 미술관에 발을 잠시나마 디뎠다. 이제사 비로소 이도영의 만평이나 출판미술이라는 것이 미술관에 등장하게 된 것이다.

 

쿠텐베르그 혁명 이후, 대량복제의 시대에 순수미술 신화에서 벗어나지 못한 태도 때문이라고 보이는 이런 태도는 근년 들어 많이 벗어나는 듯하다. 근대시기에 활판 인쇄에 의해 대량생산된 이미지도 문화사, 미술사의 고려대상으로 넣자는 진지한 논의가 일어나고 나서 일어난 일이다.

 

이도영의 '알을 깨고 나오는 병아리 그림'은 비록 단 한 번으로 끝난 만평이지만, 1919년 3·1혁명이 불러온 변화상을 보여주는 당대의 거의 유일한 시각문화 유산이다.


이도영은 이른바 계몽기에 국민교육회에 몸담아, 교과서의 삽화나 신채호가 서문을 쓴 유영표의 소설 <몽견제갈량>의 삽화를 그리거나 하면서 남다른 행보를 보였다. 나라가 바람 앞의 등불 같았던 1910년 한일병합 후 1년 여 동안, 하루하루 엄정한 시국을 맞아 국망 직전에 나라의 몰락을 막으려는 시도로 일간지에 최초로 만평을 연재하면서 커다란 반향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이도영의 작품은 언론사 연구에서 시작되어 만화사 연구로 이어지다가 근래 미술사 연구의 대상으로 평가되면서 전과는 조금 달리 다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의 만평은 세태 비판, 항일, 민족 반역자 실명 비판 등으로, 그 시절을 증언하는 미술행동이었다. 그러한 이도영의 행동은 시각문화 분야에서 거의 유일하게 의미있는 움직임이었다. 그러나 아다시피 나라는 망해버렸고, 만평은 더 이상 이어질 수 없었다. 이도영은 일본 강점 아래에서는 요시찰 인물이었음은 분명하다. 그런 상태의 이도영도 '무단정치'의 시기를 10년 거친 후 '문화통치'의 공간에서 약간의 움직임이 허용되었다. 3.1혁명이 불러온, 조금이나마 숨을 쉴 수 있게 되었던 시기가 왔기 때문이다. "이것이 웬 세상이야"라고 외치게 된 까닭이다. 

 

 

3·1혁명 이전과 그 뒤에 바꾸어진 분위기를 학교에 한정하여 살펴보자. 1910년 이후 초등과정부터, 워낙 소수였던 여학교를 제외하고, 학생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남자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는 초등 입학생을 돌보는 교사도 군복을 입고 허리에 칼까지 가르쳤다. 놀라운 일이었다. 교과서는 모조리 한국어가 아닌 일본어로 바꾸었다. 수업도 일본어로만 하였다. 한국어를 사용하면 매질을 당했다. 그래서 이 시기 학령 아동들은 학교에 가기를 꺼렸다. 이런 것이 무단통치기를 살아가던 조선의 어린이들이 맞아야 했던 환경이었다. 

 

1919년 3월 혁명으로 이런 상태는 바뀌었다. 모든 교사가 군복과 칼을 벗고 평상 복장으로 수업을 하게 되었다. 또한 비록 초등 과정에 입학한 뒤 1년 뿐이긴 해도, 조선인 교사로 하여금 조선말로 수업을 하도록 하였다. 그런 결과 지난 10년간 학교를 꺼렸던 학령 아동들이 대거 학교로 몰려 정원을 넘기고 말았다. 이로 인해 입학시험을 치루고, 몇 년 동안이나 기다리는 현상도 생겨났다.

 

 

1920년에 시작된 <개벽> 창간호의 권두화는 노수현이 그렸고 여기에 개척도라는 제목을 붙였다. 두 번째호 권두화는 장발에게 그리게 하고 그림의 제목은 아예 붙이지 않았다. 이처럼 당시 <개벽> 권두화에 실리는 그림들은 그림 안에 제목이나 문장을 쓰는 일을 꺼렸는데, 이러한 서양식 문화를 들여오다보니 제목 등의 게재 방식도 들쭉날쭉해졌다. 그렇게 창간 후 한동안 그리 인상적이지 않은 그림들이 애매하게 게재되었다. 

 

 

그러던 <개벽>은 창간 1주년을 맞아 이도영의 그림을 실었다. 이도영은 그림에 화제를 쓰는 전통적인 방식을 채택하였다. 그림 안에 제목이 들어있는 셈이다. 게다가 화제 전체를 한문이 아니라 한글로 적었다. 그린이 자신의 이름도 전통 방식에 따라 그림 안에 '리도영'이라고 낙관처럼 적어넣었다. 

 

 

이도영이 그린 이 그림은 어떤 면에서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을까? 당시 우리 사회에는 문맹자가 많았지만 한글을 읽고 쓰는 인구 비율은 상당했다. 그렇기 때문에, 한자가 아닌 한글로 화제를 적으면 그만큼 쉽게 다가설 수 있었다. 비록 일본 강점기임에도 문자혁명이라고 할 운동이 벌어지고 있었던 시기라는 점에서 이도영이 한글로 화제를 적은 것은 그 의의가 크다. 그림을 보고 화제를 쉽게 읽을수 있으면, 누구나 이것이 무슨 그림인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단박에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점은 지금도, 앞으로도 마찬가지다. 

 

'이것이 웬 세상이야, 시원도 하다'는 그림은 다시 말하지만 3·1운동이라고 흔히 말하는 1919년 봄의 전민족 봉기가 있은 지 2년이 지난 시점에 나온 그림이다. 당시에는 조선말로 내는 일간지, 월간지를 민간이 발간할 수 있었다. 비록 일본에 협력하는 세력이나 개인이 주체가 되긴 했지만, 조선말 매체가 발행될 수 있었다는 그 자체로도 의미가 컸다.

 

이도영의 그림이 실린 <개벽>지는 일본 강점시기 내내 단연 최대의 종교라 할 수 있는 천도교 세력이 발행한 것으로, 당시 최대의 발행부수를 보이던 월간지였다. 그런 <개벽>이 창간 1년을 맞아, 10년 전 만평을 통해 일본과 친일파에 대항한 역전의 용사라고 할 수 있는 이도영에게 새로운 시대의 분위기를 드러내는 만평을 그리도록 한 것이라고 보인다.

 

그런 환경을 맞아 나온 외침이 바로 "이것이 웬 세상이야!  시원도 하다"이다. 당시를 살아가던 조선 민중들에게 용기를 내서 살아가자고 북돋우는 말이 포함된 이미지를 창출한 것이 이도영의 이 그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