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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라클레스인가 예인가, 이중섭의 활쏘는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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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석태 미술평론가 |

 

 

홀딱 벗고 그림을 보고 있는 우리들을 등진 남자가 구릿빛 피부를 뽐내며 활을 쏘고 있다. 꺾은 무릎과 발가락 그리고 위로 활을 쥔 오른손이 화면 아래위로 조금은 잘려져 보이도록 그려, 인물이 화면을 그득하도록 채웠다. 그러느라 활은 아예 중요부분만 보이고 끄트머리는 보이지 않는다. 사진이나 영화에서 '접사'라고 하는 효과를 내려고 한 듯하다.

 

이렇게 인물을 자르는 것은 일반적이지 않은 방법이기 때문에 프랑스 후기 인상파 시대에 이를 둘러싸고 커다란 논란이 있었다. 전통적인 회화에서 세계가 프레임 안에 갇혀 있었던 반면, 인물을 자르는 기법은 프레임 밖에도 세계가 존재함을 암시한다. 중섭도 이 기법으로 인물을 부각시키면서도 외부 세계를 암시하는 효과를 노린 듯 하다. 

 

그런데 이 그림에 나오는 활 쏘는 남자는 누구인가? 나는 오랫동안 헤라클레스로 여겨왔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은 무엇으로 여기셨는지 궁금하다. 이 그림의 도판을 보여주고 물어보면 많은 분들이 헤라클레스라고 답했다. 우리 머릿속은 도대체 왜 그리스 로마 신화로 가득 차다시피 한 것인가.

 

다른 그림을 보자.

 

이 그림에서 활을 쏘고 있는 이 남자는 '예'이다. 예는 인간을 위해 노력하다가 고난을 겪는 신인데 태양과 관련되어 있다. 태양 열 개가 한꺼번에 하늘을 건너가기 시작하자 지상은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 태양신의 어머니가 활의 명수인 예에게 이 일을 수습하게 하였다. 그는 훌륭한 활 솜씨로 아홉 태양을 쏘아 떨어뜨려 버렸다.

 

그 덕에 세상은 다시 평화로워졌으나 그의 매몰찬 수습에 태양신이 화가 나서 예는 물론 그 부인 항아도 추방해 버린다. (산해경, 정재서 역주, 민음사, 1985; 정재서, 이야기 동양신화, 황금부엉이, 2004를 정리한 표정옥, 28~9을 추림) 그림에 나오는 예는 항상 활과 함께 그려진다. 


20여 년 전에 나는 이중섭 평전을 내면서 이 그림의 인물이 헤라클레스라고 보아, 고대 지중해 문화권의 신화에 나오는 활을 쏘는 헤라클레스를 연상하게 한다고 잘난체 하면서 써버렸다. 그 후로도 한참을 이렇게 여겨왔다. 책을 꾸며 낸 지 한 10년 정도 지나서, 중국문학연구자 선정규의 저서 중국신화연구를 읽다가 놀라고 말았다. 이중섭 평전을 써보곘다고 결심할 즈음인 1996년에 나온 책이었는데, 진즉 구해서 읽었다면 생각을 달리 했을텐데,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책의 내용은 예라는 인물이 이른바 중국신화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인데, 그가 동이계 신화 영웅이라는 놀라운 주장이며, 더 나아가 중국 신화라 알려진 대부분의 내용이 동이계통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다른 이들의 저서들에서도 신화에 나오는 활쏘기에 관련한 이야기를 동북아시아 신화로 다루면서 중국의 중화주의 태도를 비판하고 있었다.

 

이중섭이 이 그림을 그린 시기인 1941년에 헤라클레스가 아니라 예를 그린 것이 분명하다면, 이중섭은 이 신화의 내용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 분명하다. 누가 그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을까?


이중섭이 고려 청자에 새겨진 연못에서 노는 아이들 무늬, 고구려 무덤벽 그림의 봉황, 김정희의 글씨예술 등 번안하거나 소재로 쓰고 계승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림에 보여지는 숫자나 상징 등 많은 요소가 우리 미술문화에서 빌어온 것도 분명하다. 하지만 이른바 신화 관련 소재는 이중섭의 이 그림 말고는 아주 오랫동안이라 할 만치 없었다. 다행히 화가 서용선과 최민화가 20여 년 전부터 우리 신화를 그려왔다. 그들의 분투는 이런 점에서 대단히 높이 평가할 일이다. 

 

 

참고문헌

 

김선자 곽진석, 이평래, 이유진, 이용범, 동북아 활쏘기 신화와 중화주의 신화 론, 동북아 역사재단, 2010

선정규, 중국신화연구, 고려원, 1996

정재서 역주, 산해경, 민음사, 1993 개정판

정재서, 불사의 신화와 사상, 민음사, 1994

정재서, 이야기 동양신화, 황금부엉이, 2004, 서용선의 그림이 삽화로 들어있다

정재서 이야기 동양신화; 중국편, 김영사, 2010 

표정옥, 현대문화와 신화, 연세대학교 대학출판문화원, 2006, 2016 4쇄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