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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이 처음 그린 소,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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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평론가 최석태 |


이중섭이라고 하면 당장 떠올리는 것이 소 그림이 많은 화가라는 것이다. 과연 그는 소를 적잖게 그렸다. 그렇다고 소만 그린 것은 아니다. 이중섭이 소를 많이 그린 것은 확실하지만, 소를 그린 화가로만 기억하지 말기를 바란다.

 

결혼한 뒤에는 아내와 아이들을 포함한 가족그림도 적지 않게 그렸다. 새도 자주 그려서 봉황과 닭, 까마귀, 비둘기 등 새 종류도 다양하다. 달도 꽤 많이 그렸고, 여기에는 달을 보러 일어나라고 소리치는 듯 날개짓을 하는 새도 포함되어 있다.

 

아무튼 소를 자주 그린 화가라니, 처음으로 그린 소그림은 어떤 것일까 궁금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한국전쟁으로 그 때까지 그린 거의 모든 작품이 사라져버리다시피 한 상태다. 그러므로 이중섭의 초기 작업부터 제대로 파악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아래는 사진으로 남은 이중섭의 소 그림이다.

 

 

이중섭이 살던 북한의 원산은 특히 북한 수도 평양과 더불어 전쟁이 시작되자마자 시작한 미군의 엄청난 비행기 폭격으로 말 그대로 잿더미가 되었다고 한다. 이중섭이 살던 집도 파괴를 피하지 못했다고 한다. 혹시나 남은 이중섭의 작품이 있다면, 친구들에게 주었을 것으로 여겨지는 몇 점의 작품 정도가 있을까?

 

그림 속 소는 평화로와 보인다. 이후에는 화난 소, 여자와 춤추는 듯 한 소 등 이런저런 소를 그려서 다채로운 면모를 보여주지만, 이 그림의 소는 한가롭다. 소의 초상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화면에는 소 말고는 다른 어느 것도 그리지 않았다. 그만큼 그리기에 자신있었음을 알 수 있다. 잘 그린 그림이다.

 

단색으로 인화되었으니 무슨 색채인지, 원래 크기가 어떻게 되는지 모른다. 하지만 몇가지 정보를 살필 수 있다. 소를 그린 그림이라는 것과, 이 그림은 명백하게 당시 유명한 프랑스 화가 조르주 루오의 화풍이나 방법을 따랐다는 것이다. 그런데 루오는 소를 한 번도 그리지 않은 것이 분명해 보인다.

 

루오는 지금은 좀 시들하지만 이중섭이 청년기 때 매우 유명한 화가였다. 마티스와 함께 유명 화가였던 화가 귀스타브 모로의 제자로 가장 널리 알려진 화가였고, 20세기 초 프랑스 표현주의인 야수파 미술을 대표하는 미술가다. 청년 이중섭이 루오 화풍으로 그린 것은 이 그림 하나 밖에 없지만, 이중섭 말고도 많은 우리 화가 지망생이나 미술가로 활동하면서 루오 화풍을 보여준 이는 많다. 이런 현상은 우리만이 아니라 이웃나라 중국과 일본에도 적지 않다.

 

 

우리나라에서는 김환기가 루오를 가장 존경하는 화가로 꼽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일본의 당대 미술가들을 따르면서 미술가로서의 활동을 시작했을 뿐 루오 화풍을 보여주는 그림은 남기지 않았다.

 

박수근의 월남 직후 그림은 루오 화풍이라고 해도 무리가 아닌 상태를 보이기도 했다. 그는 루오를 가장 존경하는 화가로 꼽기도 했다. 그러나 박수근은 루오 화풍을 이내 벗어나, 차라리 신윤복의 미인 그림에 나타난 가는 윤곽선으로 고향 찾아 돌아가듯 돌아갔다. 윤중식과 황염수 그리고 박고석은 중간중간 작은 변화가 있기는 했지만 거의 평생 루오의 방법을 벗어나지 않았다.

 

루오는 일본에서 일찌기 1920년대부터 찬탄의 대상이 되었다. 야나기 무네요시도 그 동인이어서 유명한 시라카바파들은 루오를 비롯한 세잔, 로댕, 마티스, 피카소, 보나르 등 근대 유렵의 거장에게 열광하여 그들의 작품을 전시를 통해 소개하기도 하였다.

 

1933년 도쿄에서 루오의 그림이 상당수 포함된 후쿠시마콜렉션전시가 열려 선풍을 일으켰다. 이중섭이 이 전시를 본 것은 아니지만, 이후 루오는 많은 존경을 받으며 따라하기 대상이 되었다. 이중섭의 동료 미술가로 재북화가라서 잊혀진 김민구는 인왕상(像)을 루오풍으로 그려서, 이를 본 길진섭이 좀 더 루오의 회화를 연구하고 이해하도록 노력하라는 권고를 쓰기도 했다.

 

루오의 방법은 왜 동아시아 여러 나라의 젊은 미술가들에게 그토록 매력 있게 다가갔던가? 명암을 배제한 화풍으로 일관하던 비유럽세계, 특히 동아시아의 화법과 유사한 느낌이 강했던 점을 우선 꼽을 수 있다. 이 글에서는 더 이상 자세한 사정은 늘어놓지 않겠지만, 구체적으로는 둔황의 동굴 벽화와의 유사성도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 벽화의 최종 겉칠이 날아버려 그 아래에 그은 윤곽선이 마치 글씨예술의 붓질 같은 느낌을 보여주는 사례가 많다.

 

루오가 살던 시기에 프랑스 사람 샤반느가 둔황 벽화의 흑백 사진집을 거창한 규모로 출간해 대단히 인기를 끌었고, 루오는 이를 분명히 보았다고 여겨진다. 마티스가 페르시아 도자기 그림에서 커다란 영향을 받고, 조각가 부르델은 막 발굴되면서 충격을 준 메소포타미아문명이 남긴 조각품에 영향을 받았듯, 루오는 둔황의 벽화 영향을 확신한다. 샤반느는 우리 고구려 무덤을 방문하여 사진으로 남기기도 했다.

 

이중섭의 루오 풍 그림은 이 그림 말고도 여럿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남은 것은 흑백사진에 찍힌 이 작품 뿐이다. 어쨌거나 루오 양식을 보이는 시기는 매우 짧게 그친다. 중섭은 곧 자신의 양식을 찾아서 온 힘을 다해 노력했던 것으로 보이며, 그것은 두 번째의 <달맞이> 그림과 조선신미술가협회 창립전에 낸 <연못이 있는 풍경>이라고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