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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행, 호흡, 혁명, 그리고 증폭된 힘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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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아트 이명신 기자 |

 

아래 글은 김동원 문학평론가가 지난 6월 24일 류형수 앨범발매 기념공연 "하루"에 대하여 보내온 글이다. 진솔하고 소박한 문체 속에 현장의 생생함과 깊은 해석을 담고 있다. 김동원 평론가는 문학 뿐 아니라 예술과 대중문화 분야를 넘나들며, 여러 장르에 숨겨진 은유적 가치를 찾아 활발하게 글을 쓰고 있다. 기사 중의 사진은 모두 김동원 평론가가 직접 촬영한 것이다. 

 

류형수 앨범발매 기념공연 ‘하루’를 보러 나섰다. 장소는 왕십리의 소월아트홀이었고 그날의 날짜와 시간은 6월 24일 토요일 오후 5시였다. 공연의 명칭은 류형수 앨범발매 기념공연 ‘하루’ 였다.

 

류형수가 작곡가란 것은 알고 있었지만 사실 그의 이름은 내게 그렇게 익숙하질 않았다. 이는 나만의 경험일 수도 있겠지만, 작곡가를 가장 낯익은 이름으로 갖는 경우는 그리 흔치 않을 것이다. 그러나 공연의 출연진 가운데는 알고 있는 이름이 아주 많았다. 윤선애의 이름이 금방 눈에 들어왔고, 이소선합창단은 지휘자는 물론이고 단원의 이름을 모두 꿸 정도로 잘 알고 있었다. 합창단 '그날'도 익숙한 이름이었다. 익숙한 이름은 반갑다. 그렇게 출연진에 대한 반가움 속에 나는 객석에 앉아 있었고 그 반가움이 '류형수'란 이름이 갖는 낯섬을 무마하면서 공연은 시작되었다.

 

무대에 불이 들어왔을 때 공연의 문을 연 것은 연주였다. 다섯 명의 연주자가 연주를 했다. 가끔 음악은 음악을 다 들은 뒤에 음악에 대한 설명을 통해 그 실체를 마주할 때가 있다. 이날의 첫음악었던 연주 <하루>도 그랬다. 류형수가, 첫곡으로 들은 연주인 <하루>는 비정규직의 상황을 다룬 영화 <안녕? 허대짜수짜님!>의 사운드트랙이라고 소개를 했다. 그 순간 그 음악이 비정규직의 동행이었구나 하는 느낌이 뒤늦게 마음을 뒤흔든다.

 

 

연주에 이어진 류형수의 얘기에 의하면 한때 같은 노동자인 정규직마저 자신들 일자리를 지키기 위해 비정규직을 방패로 삼던 시절이 있었다. 그 갈등을 조장한 것이 자본이긴 했겠지만 비정규직은 세상 어디에서도 자신들의 동행을 찾을 수 없는 고립감을 느꼈을 것이다. 내가 공연에서 처음 들은 음악은 바로 그 비정규직과 동행한 음악이었다. 문득 내가 연주를 들으면서 느꼈던 아름다움이 그 동행의 아름다움이었구나를 깨닫게 된다.

 

그리고 윤선애가 나와 <저 평등의 땅에>를 불렀다. 아마도 류형수의 노래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노래가 아닐까 싶다. 류형수가 들려준 노래의 뒷얘기에 따르면 “비늘 잃은 물고기”라는 표현은 노래 <부서지지 않으리>에서 감명을 받아서 만들어졌고, 노래 속에 나오는 “긍지와 눈물”은 <긍지와 분노>라는 팔레스타인 시인의 제목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라고 했다.

 

말하자면 한 노래가 다른 노래의 씨앗이 되고 먼 중동땅에서 자유를 위해 싸우는 사람들의 긍지와 분노가 이 땅으로 건너와 이 땅에서 평등의 꿈으로 자라 노래가 된 것인지도 모른다. 언젠가 시인 김나영의 시 「원정」에서 국경을 너머 세상으로 날아가 “상처 난 대지를 꽃으로 봉합”하는 민들레 얘기를 읽은 적이 있었다. 그런데 자유를 위해 싸우는 사람의 긍지와 분노가 바다를 건너 국경을 넘고 이국에 와서 평등의 노래가 되기도 한다.
 

 

 

발표 때는 포크풍이었으나 재즈 스타일로 편곡해봤다는 <가을>을 강은영의 노래로 듣고, 이미 <하루>라는 곡이 있어 <하루2>로 이름붙인 곡은 노래 부를 이의 요청으로 신나게 만들었다는 설명과 함께 김제섭의 노래로 들었다.

 

그러고 난 뒤 류형수가 무거운 얘기를 좀 해야겠다고 했다. 그가 이태원에서 있었던 참사를 언급하며 마음대로 슬퍼할 수도 없는 나라를 입에 올렸다. 그 나라는 청년들이 제대로 숨도 쉴 수 없는 나라였다. 객석이 숨소리 하나 없이 침묵했다. 때로 어떤 동의는 말없는 침묵으로 나타난다. 침묵은 어떤 이의도 없다는 마음으로 모든 소리를 닫아 표현하는 강력하는 동의의 형태이다.

 

그리고 젊은 가수 김수린이 나와 숨도 쉴 수 없는 나라를 살아가야 하는 이 땅의 젊은이들을 위하여 만들었다는 <숨>을 불렀다. 우리는 때로 짙어진 여름 나무의 초록으로 숨을 쉴 때가 있다. 문득 올려다 본 푸른 하늘이 우리의 숨이 될 때도 있다. 이제 노래 한 곡이 또 이 땅 젊은이들의 호흡이 되었다.

 

 

그리고 류형수가 나와 직접 노래를 불렀다. <친구>를 불렀고, 한 곡만으로 끝낼 수는 없잖냐며 한 곡의 노래를 더 부르는 것으로 공연의 1부가 마감되었다. 1부를 마감할 때 내 머릿속에선 작곡가란 호칭을 싱어송라이터로 바꿔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고개를 들고 있었다.

 

 

휴식 뒤에 이어진 2부는 테너 임정현이 부르는 <먼 훗날>로 시작되었다. 그는 이소선합창단과 합창단 그날의 지휘자이나, 이 날은 먼저 테너로 무대에 섰다. 노래는 “먼 훗날 혁명의 날”이 오면 “부활꽃 피어나는 봄날 함성비 내리는 여름”이 우리와 함께 할 것이라 말한다. 혁명의 세상에선 봄날에 피어나는 꽃이 부활이 되고 여름에 내리는 비가 함성이 되리란 뜻이리라. 그러면 꽃이 필 때 삶을 다시 살고 비가 내리는 것만으로 세상을 바꿀 혁명의 함성을 모을 수 있을 것이다. 얼마나 혁명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랴. 그것은 혁명이 그렇게 어김없는 계절의 흐름처럼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는 뜻이기도 할 것이다.

 

노래를 부르는 임정현의 뒤로는 이소선합창단과 합창단 그날이 서 있었다. 두 합창단은 노래 마지막 구절, “먼 훗날 혁명의 날에 먼 훗날 혁명의 날에”를 반복할 때 “먼 훗날 날에 먼 훗날 날에”라는 화음을 보탰다. 언젠가 임정현은 이소선합창단이 <유월의 노래>를 연습할 때 소프라노의 노래 뒤로 흐르는 알토의 “아아아, 우우우”라는 화음을 “독재타도 민주쟁취 하나된 소리”에 동의를 하는 함성 소리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이러한 임정현식 해석에 의존하면 마지막 구절에서 합창단이 부른 화음은 혁명을 거스를 수 없는 계절의 흐름처럼 만들어낸 도도한 민중의 물결 같은 것이다. 노래는 혁명을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혁명이 어떻게 구현되는가를 노래로 보여주고 있었다. “먼 훗날 혁명의 날”이 잠시 모두의 것으로 그 자리의 우리와 함께 했다.

 

내가 임정현의 <먼 훗날>을 들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그가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 부르는 <먼 훗날>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 공연 뒤에 그는 무척이나 힘들어했다. 혁명의 에너지를 관객들에게 쏟아부었더니 너무 힘들다고 했다. 혼자 부를 때의 <먼훗날>은 그가 홀로 감당하는 혁명이었다. 홀로 감당하는 혁명은 힘들다. 그러나 오늘은 합창단이 혁명의 물결로 함께 해 주었다. 그가 오늘은 좀 덜 힘들었을까 싶었다.

 

두 번째 곡은 이소선합창단과 합창단 그날이 함께 불렀다. <너를 위하여>란 곡이었다. 류형수는 민주화의 과정에서 잃은 친구를 위한 진혼곡이라고 소개를 했다. 노래를 부르기 전에 지휘자 임정현이 “류형수 단원 나오세요”라고 말하여 작곡가를 불러냈다. 그는 합창단 그날의 단원 중 하나이기도 했다. 노래는 “네가 묻힌 밤 기억하리라” 말한다. 우리는 그 기억을 잊지 않겠다는 다짐이란 것을 알고 있으며 잊지 않는다는 것이 단순히 너에 대한 망각과의 싸움이 아니라 부당하게 너의 목숨을 앗아간 총과 칼에 대항하는 일임을 알고 있다. 때문에 너를 기억하는 한 우리는 부당한 정권에 대항하여 싸우며 살게 된다. 바로 그 기억을 위해 두 합창단의 목소리를 모두 모았다. 때로 기억을 위해선 정말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한 자리에 모여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모인 사람들이 기억의 노래를 부를 때 듣는 사람도 그 노래의 기억에 마음을 내준다. 기억은 이제 우리의 모두가 부당한 현실에 맞서게 해주는 힘이 된다.

 


그리고 합창단 그날이 <한걸음>을 불렀다. 노래는 “한걸음 물러서고 두 걸음 간다 전진이란 고통 속 희망인 것”이라 했다. 한걸음은 더디다. 더구나 물러선 한걸음을 두 걸음의 전진으로 나가는 한걸음이 그 한걸음일 때는 더더욱 느리다. 노래는 그 한걸음으로 우리가 걷는 길에 희망을 새기려 한다. 놀랍게도 노래는 드디어 “어제의 한걸음이 오늘의 길이 되어줄 뿐”이라며 그 한걸음으로 길을 열기에 이른다. 더구나 그 한걸음은 합창으로 부른 한걸음이었다. 때문에 한걸음은 합창단 그날의 모두가 내딘 한걸음이었다.

 

이번 공연의 마지막 순서는 이소선합창단이 이어서 부른 <선언 1, 2>였다. 선언은 장벽을 무너뜨리고 “흐르는 자유의 물결”을 따라가면 “참인간의 세상”이 나온다고 노래한다. “우리가 가야할 땅”이다. 이어 노래는 “가자 가자 저 자유의 땅에 억센 팔과 다리로”라고 노래한다. 공연이 다 끝난 뒤, 선언은 처음에는 소리가 작게 느껴지다가 가자, 가자부터 우렁차게 느껴진다고 했더니 이소선합창단의 알토 김종아가 그건 <선언 1>은 여자들만 부르는데 <선언 2>는 남자들이 같이 부르기 때문이라고 알려주었다. 나는 듣는 귀가 섬세하질 못해 그것을 작다와 크다로 구별하고 있었으나 실제로 합창단이 부른 선언은 여자들의 선언 1에 이어 남자들이 그 선언에 동참하여 목소리를 보태는 선언 2로 확대되면서 사람들이 목소리를 모을 때의 증폭되는 힘을 보여주는 노래였다.

 

합창단의 노래는 단순히 노래에 그치지 않고 그 증폭되는 힘의 구현이기도 하다. 그 증폭된 힘이 “참인간의 세상”으로 우리를 이끄는 힘이기도 할 것이다. 노래는 우리가 가야할 세상만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세상으로 가야할 힘을 어떻게 증폭시키는가도 함께 보여준다.

 

앵콜이 있었고 그 앵콜을 받으며 공연이 마무리되었다. 이제 류형수는 낯선 이름이 아니었다. 낯익은 이름들의 노래로 그의 노래를 들었고 작곡가의 이름이 가장 낯익은 이름이 되어 있었다. 인생이 때로 행운과 불운으로 우리의 시간을 갈라놓는다. 소월아트홀에서 본 공연 ‘하루’도 우리의 운명을 그렇게 갈라놓았다. 하지만 어쩌랴. 공연을 보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공연을 놓친 것은 불운이었다. 하지만 나는 공연을 보았다. 나는 행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