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에서 정거장은 그 지방의 뼈대이며 핏줄이다. 또한 사방에서 모여드는 사람들로 인해 서로 어우러진 삶이 꿈틀거리는 곳이다. 장사하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모여들고, 물건의 교류가 저절로 이루어져 작은 장이 되어 흥청거린다. 장날이면 농사지은 것을 이고, 지고 나온 보따리가 먼저 정거장에 도착한다. 장(場)으로 가려던 사람들은 정거장에서 만난 중간상인과 몇 마디 말을 주고받다가 사고파는 일이 이루어져 굳이 장(場)에 가지 않아도 흥정이 끝나 버린다. 정거장은 어떤 이에게 그리움 일수도 있으며,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릴 수 있는 곳이다. 한낮의 먼지바람을 일으키며 달려드는 버스를 향해 걸어가는 해창아짐의 발걸음이 노랑 병아리처럼 경쾌하다. (사진.글/장터사진가 정영신)
몇년전까지만 해도 산간지방에 눈이 많이 내렸다, 1987년 폭설로 정선장이 열리지 않아 무작정 버스를 타고 시골마을에 들어갔었다.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상태에서 마을 안까지 들어가 눈을 치우는 어머니들을 만난 것이다. 박씨할매는 밤새 소리없이 사박사박 눈 내리는 소리에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며 문을 열고 강아지를 불렀다. 주루루 달려가는 강아지와 박씨할매의 대화를 듣는데 갑자기, 내 어릴 적 고향이 수직으로 걸어와 멈췄다. 우리집 복실이는 강아지답지 않게 식구들 얼굴하며, 목소리까지 기억해 한 가족처럼 지냈다. 눈 오는 날이면 복실이와 함께 뒷동산에 올라가 썰매 길을 만들며 온종일 뛰어 놀았던 그때 그 시절로 시간여행을 떠난다. (사진.글/장터사진가 정영신)
내가 어렸을 적에는 가족이나 친구들끼리 모여 다 함께 놀았다. 우리가 갖고 놀았던 것들 또한 순수한 자연물이었다. 지금아이들은 학원 아니면 기계와 논다. 사진에서처럼 작은 돌을 모아 공기놀이하는 아이들이 없다. 아이들은 놀이를 하면서 사회성도 배우고, 정서도 배우고, 창의성을 배운다. 창의성개발을 위해 아이들을 공부와 책에 붙들어놓지만 아이들은 놀이를 통하여 자기의 환경을 탐색하고, 세계를 이해하고, 문화를 배우면서 세상살이를 알아간다. 지금 문명은 시간이 만들어낸 것일까. 아이들은 너른 마당을, 드넓은 들판을 모른 채, 방안에서 사람이 만든 기계와 말하고, 보고, 기계에 맞춰 세상을 배운다. (글.사진/장터사진가 정영신)
매달 음력 보름날이면 달이 마치 서 있는 것 같은 월출산은 금강산과 설악산에 비할 만큼 빼어난 경치를 자랑하면서 남도의 작은 금강산, 남도의 설악산으로 불린다. 월출산은 신라시대에는 월나산(月奈山), 고려시대에는 월생산(月生山), 그 후 조선시대를 거쳐 월출산(月出山)으로 불리게 되어 올림픽이 있던 해인 1988년에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돌 끝이 뾰족뾰족하여 날아 움직이는 듯하다’는 월출산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돌 봉우리들이 높고 또 낮게, 굵다랗고 또 가느다랗게 뾰족뾰족 둘러서 있어 작은 금강산이라고 불릴 만큼 아름다운 산이다. 고려 명종때의 한 시인은 ‘푸른 낭떠러지와 자색의 골짜기에는 말 떨기가 솟고, 첩첩한 산봉우리는 하늘을 뚫어 웅장하고 기이함을 자랑 하누나’고 예찬했다. 또한 구정봉 아래에는 움직이는 돌에 대한 여러 가지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영암이라는 지명이 월출산 돌 때문에 생겼다고 ‘동국여지승람’에 적혀있다. “월출산에는 세 개의 움직이는 큰 바위가 있었다. 이 움직이는 세 돌 때문에 영암에 큰 인물이 난다고 전해져, 이를 시기한 중국 사람들이 움직이는 바위 세 개를 전부 떨어뜨렸다. 그런데 그중 움직이는 돌 하나가 스스로 옛 자기
길은 마을과 마을을 잇고, 사람과 사람을 잇는다. 시간이 품은 이야기를 통해 지난 시간과 다가올 시간을 잇기도 한다. 사람들 또한 길을 통해 이동하면서 다른 많은 것들을 연결하면서 이어 나간다. 원래 길은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저절로 생겨나 짐승이나 사람이 하나둘 지나다니기 시작하면서 만들어진다. 난 ‘길’이란 이름을 입안에 올리면 아름다운 지구인 ‘존 프란시스’를 생각한다. 그는 22년간 길을 걸었고, 17년간은 침묵여행으로 환경을 지켜내는 변화를 시도해 ‘플래닛 워커’라는 책을 썼다. ‘플래닛 워커’는 1971년 샌프란시스코 만에서 일어난 기름유출사고를 보고 ‘편안을 누리며 사는 삶’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자동차대신, 걸으면서 길에서 마주친 사물과 사람들에 대해 기록한 책이다. 그는 길을 걸으면서 우리가 잊어버렸던 자연의 리듬을 발견하고, 말 한마디 없이 이해와 공감을 전하는 법을 배웠다고 한다. 이 특별한 순례자의 삶을 들여다보면서 내가 살아가는 이 땅에서 어떤 행동과 실천으로 변화를 느끼고, 지구를 살릴 수 있을까 고민해본다. (글.사진/ 장터사진가 정영신)
장터에 가면 호주머니 속에 숨어있던 고향이 사람들 틈 속에서 걸어 나온다. 이른 아침부터 보따리행렬은 생활을 진열하기 위해 장터 속으로 들어온다. 농산물을 가지고 장에 나오는 사람들 모습은 비장하다. 좋은 가격에 농산물을 넘기려는 사람들 표정이 활시위처럼 팽팽하기만 하다. 작은 경제가 일어서는 모습이 장터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또한 여인네들의 보따리 속에는 자녀들의 꿈과 희망이 숨어있다. 여인들에게 땅은 보물창고다. 온갖 씨앗에 비밀을 담아 봄이 되면 보물창고에 시간을 심어 넣는다. 바람소리와 풀소리 그리고 물소리마저도 비밀이 되어 땅속에서 만나게 된다. 여름 내내 밭을 매면서 호미끝자락에 비밀을 묻어놓아 가을이 되면 캐내는 것이다. 드넓은 땅에 콩등을 심어 놓고도 어느 밭에서 순이 제일 먼저 돋아나고, 어느 농작물에 마지막으로 해가 스며드는 것까지 알고 있다. 장날이면 자연도 보따리에 숨어 장터까지 따라 나온다. 장터란 이렇게 땅이 있어 장이 서는 광장이다. 장터에 가면 고향의 냄새와 맛, 소리와 감촉까지 느낄수 있다. ‘손주놈 오면 줄라고 넉달동안이나 시렁에 매달아 놓았는디, 손주놈은 안오고, 돈도 아쉽고 해서 장에 갖고 나왔는디 맛좀보시랑게 잉,
누군가는 고향은 도시인들이 잃어버린 낙원이라고 한다. 내 유년시절의 고향은 순수함의 공간 그 자체였다. 지금 내 고향은 오라는 이도, 가라는 이도, 기다려주는 이도 없지만 내 존재의 모태임을 인식하게 된다. 내가 어렸을 때 가을걷이의 꽃은 쌀농사였다 나락을 베고 난 논에 이삭 하나라도 떨어져있는지 달이 환하게 뜨는 날, 온 식구가 논에 가서 벼이삭을 주웠다. 난 검정고무신을 신고 도레미파솔라시도를 부르며 살포시살포시 밟아가며 달빛에 비치는 논바닥을 훑으면 손안에는 제법 나락이 쥐어져 있었다. 그 당시 농촌은 쌀이 곧 삶이었던 시대였기에 논바닥에 떨어진 이삭하나도 버리지 않고 주었다. 망태기에 가득 담겨진 이삭을 보며 온 식구의 웃음소리에 놀란 달빛은 우리 동네 끝집 단골네 집을 건너 우리집 싸리문에 데려다주고 홀연히 사라졌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늦가을이면 엄마와 함께 가을걷이를 하러 고향땅에 내려갔는데 지금은 집안에 앉아 쌀을 받는 세상이다. 엄마가 저쪽 세상으로 가셨으니 논을 팔아야 하는데 올해만 올해만 하다가 그게 언제가 될지 모르겠다. (사진.글/정영신)
지리산 남쪽 끝자락에 조선시대에 지은 구례 운조루가 있다. 구름 속의 새처럼 숨어 사는 집이라는 뜻으로 호남지방의 대표적인 양반 가옥이다. 운조루에 가면 유럽을 앞서 조선시대에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몸소 실천하고 있는 유씨라는 양반가가 있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유럽 사회고위층 인사에게 요구되는 높은 수준의 도덕적 의무다. 근대와 현대에서도 이러한 도덕적 의식은 계층 간의 대립을 다소나마 해결할 수 있는 최고의 수단으로 여겨져 왔다. 특히 전쟁과 같은 총체적인 국난이 벌어졌을 때 백성들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양반들이 솔선수범하는 모습은 백성을 위하는 도덕적 책임이다. 운조루에는 각종 민란과 여순사건, 6.25전쟁으로 굶어가는 백성을 사랑하는 양반의 두 가지 정신이 지금까지 건재하게 이어오고 있는데 ‘타인능해(他人能解’)와 ‘낮은 굴뚝’이다. 백성들의 굶주림을 줄여주고자 나무 독에 쌀을 채워놓고, 마을의 가난한 사람은 누구나 이 쌀독을 열어, 쌀을 빼 갈 수 있도록 열어두었다는 ‘타인능해(他人能解’)다. 또한 다른 지역 고택들과 다르게 운조루에는 높은 굴뚝이 보이지 않는다. 이는 가난한 백성을 위한 배려로 돌과 흙으로 빚어진 ‘낮은 굴뚝’은 안채중심
오리 몇 마리, 그 옆에 강아지가 지켜보는 가운데 초가지붕을 단장하기 위해 짚을 엮고 있다. 벼 수확을 끝낸 마당에는 짚이 장독대까지 나와 있다. 빛바랜 초가를 내리고, 새로운 초가지붕을 올리기 위한 준비다. 오리가 조근조근 대화하는 소리, 강아지가 오리 대장하는 소리, 사각사각 짚 엮는 소리가 늦가을의 스산함을 대신한다. 브하그완은 ‘사색이란 감각의 하나로 감수성이나 예민함으로 융합하는 것’이라고 했다. 감각을 느끼고 감수성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사물의 사색이다. 사물이 사색에 젖어 있을 때, 사물에서 들리는 소리가 모든 감각을 깨우기 때문이다. 특히 물 흐르는 소리는 생각의 흐름을 따라가는 것 같다. 물끼리 서로 비비는 소리가 들리는 듯, 사각사각 짚 엮는 소리가 점점 다가오는 것 같아 그 소리를 품어 본다. 어릴 적 뛰어 놀았던 골목에서 볏단 속으로 햇빛이 숨어 드는 소리가 들려온다. 시간이 수직으로 서서 내게 걸어온다. (글. 사진/정영신)
[기고] 장터사진가 정영신| 어느날 여름 통도사에서 만난 속이 텅빈 나무의 형상이다. 오래된 나무는 속이 텅텅 비워가면서 죽어간다.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기자신을 조금씩조금씩 비워냈나보다. 600년이란 시간을 고스란히 담아 내게 말을 걸어온다. 시간이 한 방울씩 흘러가는 길위에서 죽어있는 나무의 흔적을 더듬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