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얼굴은 하나의 풍경이요, 한 권의 책이다’라고 했던 발자크는 일찍부터 인간의 표정에서 삶을 읽었나 보다. 얼굴 표정에서 한 사람의 인생을 상상한다는 것은 또 다른 즐거움이다. 장터에 나와 붕어빵을 먹으며 행복하게 웃는 모녀의 모습이 한 장의 풍속화를 보는 것 같아 덩달아 행복해진다. 지치고 힘든 농촌생활 뒤에 모처럼 장나들이를 했는지 마냥 즐거운 표정이다. 시골 장에서만 맛볼 수 있었던 붕어빵, 추운 겨울날 김이 모락모락 날 때면 다 익었나 열어보며 돌리는, 붕어빵장수의 바쁜 손길을 바라보며 기다리는 순간은 행복한 추억이다. 이윽고 갓구어져 나온 붕어빵을 이손저손 옮겨가며 야금야금 베어먹던 때가 34년이 지났건만 마치 어제 일 같다. 환하게 웃는 모녀의 모습에서 삶의 아름다움과 숭고함을 느낀다. 사진을 찬찬히 보고 있으면 모녀의 모습이 시간으로 건너가는 것이 보인다. 그리고, 그들의 미소가 빈 오선지 위에 그려져 소리가 들린다. (글. 사진/장터사진가 정영신)
곰방대하나로 장터바닥을 지휘하던 야채 파는 할매는 내 동무였다. 장(場)에 왔다는 신고를 하지 않고, 어슬렁거리다 마주치면 긴 곰방대가 여지없이 내 등짝을 내리쳤었다. 영동장에 가면 삼각대와 카메라 가방을 맡겨놓고, 점심도 한 숫가락씩 나눠 먹고, 막걸리 한 사발로 세상을 다 가진 듯, 할매와 나는 해가 장을 빠져나갈 때까지 놀았었다. 허나, 지금은 사진만이 남아 곰방대할매와 나의 시간은 촘촘하게 짜여진 그물처럼 과거와 현재를 연결해준다. 1991년 어느 장날 오후, 바람이 일어 배춧잎 하나가 팔랑거리는 풍경을 놓치지 않았던 그날 처럼, 수직으로 흘러내린 한겨울의 햇살이 내 창가에 내려와 앉는다. 오늘 할매 사진을 보고 있자니, 두고 온 내 고향 언저리처럼 서럽다. (글.사진/장터사진가 정영신)
푸른빛이 감도는 새벽, 긴 신작로 길을 개미행렬처럼 손수 만든 죽물(竹物)을 이고, 지고 많은 사람들이 장터로 몰려오던 때가 있었다. 마을이 있으면 대나무가 있고, 대나무가 있는 곳엔 마을이 있다는 담양의 죽제품은 조선시대부터 시작하여 5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담양 사람들이 농사를 지으면서 짬짬이 만들어낸 죽물은 담양전체 생산액의 절반쯤을 차지하고도 남았었다. 이른 새벽에 죽제품을 이고지고 나오면 호랑이도 도망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담양의 죽물시장은 컸다. 심지어 다른 지방에서 죽제품을 갖고 담양장에 모여들어 산더미처럼 쌓여있던 죽제품은 우리나라 곳곳에 팔려 나갔다. 우리선조들은 자연과 인간이 하나로 응축되어 대나무를 자연의 벗으로 찬양했다. 장이 서지 않는 날에는 집에서 온갖 종류의 죽제품을 만들어 장날이면 새벽부터 나와 죽제품을 팔았다. (글.사진/장터사진가 정영신)
옛날이나 지금이나 봄이 아니래도 장터에 가면 씨앗 봉지를 펼쳐놓고 열심히 설명하는 씨앗 장수를 만난다. 1990년에 전북순창장에서 만난 씨앗 장수 할매는 하얀주머니를 만들어 그 안에 씨앗을 담아 팔면서 어떤 씨가 어느 봉지에 담겨 있는지 훤히 꿰고 있었다. “할머니 머리가 좋으시네요” 인사를 하면 장사하는 사람은 기억력이 좋아야 한다며, 씨앗 봉지 같은 미소를 지었다. “금매 아욱씨 100원어치만 주랑께 왜 안판다고 그러요. 100원은 돈이 아닌감네이!” 백원어치는 안판다는 할매와 백원어치만 팔라는 할매가 한참을 실갱이 하면서 찾아낸 합의점이 500원어치다. 신문지에 500원어치 아욱씨앗을 싸주자 씨앗을 받아든 안씨할매가 구시렁구시렁 볼멘소리를 하지만 못들은 척 고개를 돌려 돈을 셈하고 있다. 이들을 한참 지켜보면 내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지고 인생을 순하게 살아내는 모습이 참으로 숭고해 보인다. 한치 양보도 없을만큼 팽팽하더니 500원치 아욱씨를 통크게 산 할매가 보자기 속에 씨앗을 넣더니 머리에 이고 총총히 사라진다. 이렇듯 장터에 가면 살아있는 날것 그대로의 삶을 만난다. 장터는 물건을 사고파는 곳이기 전에 정(情)을 나누는 고향이 아닐까 싶다.
논산 개태사에 가면 고려의 태조 왕건이 나라를 세우고 개국 사찰로 창건한 개태사 주방에서 사용한 것으로 전해지는 철확이 있다. 충청남도 민속문화재 제1호로 등록되어있는 철제가마솥이다. 장터에서 엿듣는 지역문화는 덤이다. 장터에서 사진 찍는게 안쓰러운지 어르신들의 주문은 날로 늘어만 간다. 연산임리에 산다는 주영길씨는 개태사에 있는 철확이야기를 해주었다. “일본놈들이 지그 나라로 가져가려고 그 큰 가마솥을 부산까지 가지고 내려갔데유. 그란디 가마솥을 배에 실으려고 허니께 솥에서 큰소리가 나서 한바탕 소동이 일어 났대유, 그란께 선적이 보류되었지유. 여그 지역사람들이 이 가마솥을 찾을라고 진정서도 내고 난리굿을 다 했시유” 일본으로 실려 가지 못한 철확은 경성박람회에 출품됐다가 한동안 논산연산공원에 전시되었으며, 1981년 개태사로 옮겨왔다. 큰 가뭄이 들때마다 이 솥을 다른 곳에 옮기면 비가 온다는 전설이 있어 연산부근으로 옮겨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태조 왕건이 5백명의 중에게 국을 지어먹을 솥으로 내려준 것으로 알려진 개태사 철제가마솥은 개태사가 폐허가 된 후 벌판에 방치되다가 다시 개태사로 옮겨졌다. 일본태평양전쟁이 일어나던 해 철확을 녹여서 무기를 만들려
작가 김훈선생은 자신의 ‘자전거 여행’ 책 첫머리에 ‘자전거를 타고 저어갈 때, 세상의 길들은 몸속으로 흘러들어 온다’고 했다. 어르신들이 자전거를 이용해 장(場)에 오는 모습을 보면 그 마을의 풍경과 계절, 그 마을의 삶까지 고스란히 들어있어 나도 모르게 인사를 하게 된다. 해평면 금호리에서 왔다는 이씨아짐이 사는 마을에는 신라에 불교를 처음 전한 아도화상이 연꽃을 심었다는 연지(蓮池)가 있다. 이 연꽃은 살아있는 역사처럼 일제강점기에 연꽃이 거의 사라졌다가 8.15광복 후에 다시 살아나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렇듯 장터는 우리의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숨은 이야기가 있다. 과거는 해석에 따라 바뀌고, 현재는 지금 행동하기에 따라 바뀐다. 코로나19 이후로 장터모습이 한산하기 그지없다. 햇빛과 바람과 구름과 비, 그리고 우리 농민들이 키워낸 농작물이 하나둘 장에 나오는 계절이다. 생생하게 살아있는 삶을 만나러 가까운 장(場)에 가자! (글.사진/장터사진가 정영신)
소설가 발자크는 “사람의 얼굴은 하나의 풍경이자 한권의 책이다.” 고 했다. 장터에서 만나는 엄니 얼굴을 바라보면 그 사람이 살아온 인생의 무늬가 보인다. 눈가의 주름은 가고 싶은 곳의 추억이고, 입가에 주름은 행복해 웃을 때라고 한다. 주름진 엄니 얼굴을 대하면 어떤 生을 살아 왔을까 그의 속내를 들여다보고 싶다. 물맛에 따라 지역에 따라 바닷가 사람, 산중사람 얼굴이 다르다. 그 다름을 보려면 얼굴을 마주 봐야 한다. 이들 얼굴에서는 세월이 켜켜이 쌓여 자연의 소리가 들린다, 가을이 오는 소리, 비가 내리는 소리등등 세계의 소리와 냄새가 얼굴에 다 들어있다. 그래서 난 삶을 관통한 엄니얼굴 보러 장(場)에 간다. 모진 세월로 살아 빚어낸 남도육자배기가 흘러내리는 엄니, 장터 골목 귀퉁이에서 홍시감 몇 개 소쿠리에 담아, 고루 내리는 햇빛을 등에 이고, 앉아 있는 엄니, 자연과 흙과 나무에서 흘러내린 푸르디푸른 이야기를 하는 엄니, 사람이 그리워 호박한덩이 갖고 나온 엄니, 희로애락(喜怒哀樂)이 숨어있는 보물창고 같은 엄니들 만나러 장(場)에 가자. (글.사진/장터사진가 정영신)
내가 어렸을적, 장날이면 소달구지가 동구 밖에 서 있었으며, 집집마다 잔치 날처럼 시끌벅적했다. “아따메 우무치떡아 빨리나오랑께, 오사게도 기다리게 했쌌네잉 뭐헌당가 빨리오랑께“ 여기저기서 부르는 소리에 동구 밖에 서 있던 소(牛)가 헛기침을 하며 떠날 준비를 서두른다. 토방 위에 가지런히 누워있던 하얀 고무신을 신고, 하얀 모시 한복을 입은 동산아재가 제일 먼저 나와 여자도남자도 아닌 목소리로 아무개 댁을 부른다. 동구 밖에 나와 있는 아이들 몇이 얼굴을 모우더니 끼덕끼덕 웃는다. 이렇게 한참이 지나면 한해도 거르지 않고 매년 같은 꽃으로만 피는 코스모스 길을 따라 어른들은 장터로 향했다. (글.사진/장터사진가 정영신)
길옆에 서 있던 나무가 마중 나와 내게 인사를 하는데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 가던 길을 멈추고 나무에게 다가가 “왜 나에게 인사를 하느냐?” 물었는데 나무 대답이 걸작이다. “인간들은 내가 살아있는지, 햇빛을 느끼고 있는지, 바람의 세기에 따라 소리를 내고 있는지, 비를 맞으면서 일어서고 있는지, 눈이 내릴 때 내 가느다란 몸 줄기가 떨고 있는지, 도무지 알려고 하지 않아 살아있는 나무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란다. 우리는 바쁘다는 핑계로 너무 많은 것들을 보고도 못 본채 무심코 지나친다. 자연은 자기를 한껏 뽐내면서 보여주고 있는데, 사람들이 눈길도 안주기 때문에 나무스스로 사람들을 향해 인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잠시 하는 일을 멈추고 자연이 아는 체하면 그에 응답하는 시간을 가져보면 어떻까 싶다. (사진.글/장터사진가 정영신)
비오는 날이면 우산 없이 마냥 걷고 싶어진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비오는 날이면 우산이 없는 척, 온몸으로 비를 받아들이곤 했다. 아마도 시골생활에서 보았던 풍경 때문일 것이다. 몹시도 가뭄이 들던 여름에 비한방울이 주는 풍요로움은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었다. 온 마당에는 비를 담을만한 것들이 총동원된다. 한 방울이라도 더 받아두기 위해 빈 그릇까지 출동했다. “영신아! 비 온다. 비! 비와야! 비! 비 받아라, 한 방울이라도 더 받아야 삼밭에 물주는디....“ 어렸을 적 추억이 몸에 배어 지금도 비를 담는다. 온몸으로 담기도 하고, 우산 위로 흐르는 비를 담기도 한다. 푸르디 푸른 색깔 속에 흘러내리는 빗속에 들어가 자연과 사귀는 시간을 마중 나가야겠다. (사진.글/장터사진가 정영신)